원평리의 일명 미륵댕이 마을에 있는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으로, 2004년 4월 2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에는 신라 성덕왕 1년(702)에 창건된 선조사(善祖寺)가 있었다고 하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폐사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자세한 사찰의 연혁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관련 유물로 추정되는 미륵불입상과, 화사석이 결실된 사각형 석등이 있다. 불상 옆 우측으로 약 7m 지점에 이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이 탑 이외에도 1930년대에 다른 곳으로 이전한 삼층석탑 1기가 더 있었다고 한다. 불상은 고려시대 전반기 유물임이 확인되었으며, 탑신은 이 불상과 같은 석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2.95m이며, 지대석 폭은 1.88m이다. 탑은 결손 부분이 많으며 기단과 탑신의 풍화 정도가 큰 차이를 보인다. 사각형의 자연 암반을 지대석으로 삼았는데, 단층기단이 놓이는 부분은 면석을 집어넣을 수 있게 안쪽을 약간 깎았다. 기단은 두 장의 동 · 서 면석 사이에 다른 두 장의 판석을 끼워 만들었으며, 동 · 서 판석 면이 남 · 북 면의 우주를 겸비하고 동 · 서 면의 우주는 얕게 모각하였다. 기단과 각 층의 우주는 지나치게 좁게 표현되어 건물 기둥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끼워져 있는 기단 면석의 하나가 결손되어 들여다보이는 내부에는 안쪽이 다듬어져 있지 않은 면석이 노출되어 있다. 기단 갑석은 큰 편으로 얇으며 위로 탑신 받침이 넓게 1단 각출되었다. 동 · 서 면석에는 전면에 걸쳐 3개의 수형(獸形) 다리가 유려한 큰 향로가 두드러지게 면각되었으며, 조각 내부는 몇 개의 음각선으로 세부를 표현하였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비록 3층 옥개석이 유실되었으나 각 층이 정확하게 정사각형으로 다듬어져 있어 기단부와는 달리 정치한 일면을 보인다. 옥개석 낙수면 우동마루 전각(轉角)은 투박하나 추녀 상단은 부드럽게 반전하고 있고, 3단의 낮은 옥개석 받침을 가지고 있다. 초층 탑신에 비해 2·3층의 탑신 높이는 현저하게 감축하여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비례를 보인다. 초층 면석 각 면에는 약 5㎝ 가량 돌출된 입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세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많은 탑들에서 알 수 있듯이 사천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륜부는 일부 손상된 노반석이 놓여 있을 뿐이다.
이 탑은 관련 자료를 잃어버린 채 황폐하게 남아 있는 절터처럼 그 원형이 일부 변형되고 손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정연한 구성과 초층 면석에 돌출된 양각의 조각이 남아 있는 3층의 탑신은 좌측의 불상과 동시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기단 면석의 향로 조각은 초층 탑신면의 조각과는 전혀 다른 수법으로 불탑에서는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예이다.
이 삼층석탑처럼 기단부와 탑신부가 여러 면에서 다른 시대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 점과 기단부 탑신 면석에 승탑의 경우처럼 향로가 조각된 점은 연구 대상이 된다. 또한 이 탑에 보이는 다양한 양식적 요소들은 이곳에 있었던 사찰의 험난했던 역사에서 비롯되었던 여러 차례의 석탑 변형을 상정시킨다. 이 중 탑신 부분은 고려 중기를 넘지 않는 양식으로 보이며, 이 시기 석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