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산은 해방 이후 국군첩보대 소속 대북요원으로 활동한 군인이다. 상해에서 사업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했다. 이 무렵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로 항일운동을 하고 있던 조봉암을 만났다. 해방 이후 신의주에 건국무역사를 차려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남하였다. 1955년부터 대북첩보기관의 요원으로서 대북교역을 담당하는 등 ‘이중간첩’으로 활약하였다. 1956년 북한정권의 자금을 조봉암에게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1958년 조봉암 등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1959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었고, 조봉암의 사형도 집행되었다.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본명은 양리섭(梁利涉)이다. 항일운동 시절에는 김동호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그가 주로 HID 요원으로 남북교역을 할 때에는 양명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양장우(梁壯宇)로도 통했다고 한다.
양명산이 신의주 우체국의 집배원으로 근무하던 중, 우편행낭 속에 든 거액의 중국 돈을 훔쳐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이후 상해(上海)에서 사업에 종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이 무렵 조봉암(曺奉岩)도 상해에서 ‘코민테른 원동부 조선대표’로 항일운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조봉암은 프랑스 조계(租界)에 살았는데, 양명산이 이웃에 살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31년 6월 양명산은 ‘우편물 절도와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4년간 옥살이를 했다. 양명산에 앞서 조봉암도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기에, 두 사람은 1년여 동안 같이 수형생활을 하였다.
8·15 해방 후 귀국한 그는 신의주에 건국무역사(建國貿易社)를 차렸다. 1946년 8월 남하한 그는 인천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해상을 통해 북행을 준비하던 중, 미군 CIC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무렵 인천에서 조봉암과 다시 만났고, 이해 12월 육로로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들아가 건국무역사 운영을 지속하였다.
6·25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휴전 후에는 강원도 속초에 수산물상회를 차리고, 평범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5년부터 미군첩보기관과 북한의 대남교역 및 첩보기관인 선일사(鮮一社)의 양해 아래, 남북을 내왕하는 교역 상인이 되었다.
그는 대북첩보기관인 HID 요원으로서 북한을 내왕하며, 대북교역을 담당하는 등 ‘이중간첩’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천지역 CIC와 HID에서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던 인물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1955년 여름 조봉암과 양명산은 다시 만났다. 1956년 봄, 그는 5월 15일의 정 · 부통령 선거를 앞둔 조봉암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하였다.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유세 중 사망하는 이변 속에서, 조봉암은 216만 표를 상회하는 지지를 받았다. 집권당인 자유당은 조봉암의 존재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고, 끝내 양명산이 제공한 자금이 ‘북한정권의 자금’이라는 혐의가 조봉암에게 씌워졌다.
1958년 1월 13일 소위 ‘ 진보당사건(進步黨事件)’으로 조봉암 등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7월 2일의 언도공판에서 조봉암과 양명산은 각각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고, 나머지 17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10월 25일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두 사람에게는 원심을 파기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1959년 2월 27일의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두 사람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판결문에서는 양명산을 ‘남과 북의 이중간첩’으로 규정하였다. 7월 29일 양명산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이틀 후인 31일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자유당정부의 장기집권 음모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대 한국현대사를 배경으로, 양명산과의 만남은 끝내 조봉암의 목에 밧줄을 거는 빌미가 되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