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진년대통력 ()

과학기술
유물
문화재
조선 초기의 역서(曆書).
정의
조선 초기의 역서(曆書).
개설

200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진년대통력(庚辰年大統曆)은 조선 선조 12년인 기묘년(己卯年, 1579년)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어 이듬해인 경진년(庚辰年, 1580년)에 사용된 역서(曆書)로서, 조선의 역서들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서이다. 2013년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의 여러 국학기관들과 박물관, 도서관들에는 조선의 역서들이 수백 책 이상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서 1580년 이전에 간행된 역서는 이 경진년대통력이 유일하다.

내용

‘경진년대통력’이라는 명칭은 ‘대통력법(大統曆法)에 의거하여 만든 경진년(庚辰年)의 역서’라는 뜻이다. 대통력은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역법으로서 원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토대로 만들어진 역법이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정삭(正朔)을 받는 제후국이었으므로 대통력을 사용하여야 했다. 하지만 조선은 세종대 이후부터 명나라의 대통력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수시력과 대통력을 바탕으로 한 역산서(曆算書)인 『칠정산(七政算)』을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역일계산을 독자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역서를 별도로 간행하여 사용하였다. 경진년대통력은 조선이 세종대 이후부터 역계산을 별도로 수행하고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였음을 보여준다.

경진년대통력은 앞뒤의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15장 3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의 앞면, 즉 제1면은 달의 대소와 24절기의 시각을 싣고 있는 단력장(單曆張) 부분이 실려 있다. 이 단력장 부분을 살펴보면, 이 해 경진년(1580년)에는 윤달이 윤4월로 들어와서 전체 달수가 13이며 그 결과 한 해의 일수(日數)가 모두 385임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장의 뒷면, 즉 제2면에는 그해에 길흉신(吉凶神)이 깃들어있는 방위를 그려놓은 연신방위도(年神方位圖)가 실려 있다. 이어진 두 번째 장의 제3면에서부터 제14장, 즉 제28면까지는 정월에서 12월까지의 월력(月曆)들이 각각 2면씩 차지하며 수록되어 있다. 이 해는 4월 다음에 윤4월이 있으므로 월력장(月曆張)은 모두 13장 26면이다. 마지막의 제15장, 즉 제29면과 제30면은 부록장(附錄張)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일상생활의 대소사와 관련된 길흉신이 들어오는 날짜와 방위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이 해의 역서 간행을 담당한 관상감(觀象監) 소속 중인(中人) 관료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여기에 따르면, 경진년 역서의 간행에 참여한 관상감 관원은 역일 계산을 담당하는 수술관(修述官) 3인과 인출(印出)을 책임진 감인관(監印官) 2인이다.

특징

경진년대통력은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시기까지 간행된 역서의 형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역서는 황제국인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형식이 조금씩 변화되었는데, 이와 같은 형식의 변화는 크게 제1기부터 제3기까지의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제1기는 조선 초기부터 선조 31년(1598)까지에 해당하고, 제2기는 선조32년(1599)부터 인조 15년(1637)까지에 해당하며, 제3기는 인조 16년(1638)부터 고종 31년(1894)까지에 해당한다.

경진년대통력은 제1기에 간행된 조선 역서의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우선, 제1기에 간행된 조선의 역서에서는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표기하지 않는 대신 단력장의 첫 줄에 ‘태세(太歲)’가 위치한 갑자(甲子)를 표기함으로써 해당 역서가 어느 해의 역서인지를 나타냈다. 이에 비해 제2기의 역서에서는 명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제3기의 역서에서는 청나라의 국호와 연호를 단력장에다 명시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진년대통력에는 단력장의 첫줄에 “태세재경진(太歲在庚辰)”이라는 구절로 이 역서가 경진년의 역서임을 표시하고 있다.

한편, 제1기의 역서에서는 단력장과 연신방위도가 각각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제2기 이후에 간행된 역서에서 각각 2면을 차지하는 것과는 분명하게 비교된다. 그러므로 제1기에 간행된 경진년대통력을 살펴보면, 단력장과 연신방위도가 각각 한 면만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임에도 세종 이후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였다. 경진년대통력은 세종시대 이후 조선에서 역서를 독자적으로 간행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한편, 조선의 역서는 황제국인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에 영향을 받으면서 그 형식이 조금씩 변화되었는데, 경진년대통력은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시기까지 조선에서 간행된 역서의 형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경진년대통력은 조선시대 과학기술사와 조중(朝中) 관계사 연구 등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의 역서 간행과 로컬사이언스」(박권수,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1호, 한국과학사학회지, 2013)
「경진년 대통력 소고」(김종태, 『생활문물연구』 제7집, 국립민속박물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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