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통영측우대(統營測雨臺)는 경상도 통영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설치하였던 석재 받침대이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통영측우대는 사각 기둥 모양의 측우대 부분과 이를 받치고 있던 둥근 받침돌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사각 기둥 모양의 측우대의 앞면 중앙에는 ‘측우대(測雨臺)’라는 글자와 ‘신미 2월(辛未 二月)'이라고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명문을 토대로 통영측우대는 1811년(순조 11), 또는 1871년(고종 8)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통영측우대는 제작연대가 확실하게 새겨져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로 평가된다.
측우기의 제도는 1441년(세종 23)에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지만 임진왜란 이후 그 제도가 쇠잔해졌다가 1771년에 영조에 의해 다시 복원되었다. 이후 전국의 팔도감영과 유수부(留守府)에서 관할 지역의 우택(雨澤)과 농형(農形)을 한양에 보고할 때에 측우기를 이용하여 측정한 우량을 함께 보고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각지 관청에서 생산된 주요 문서들을 정리해놓은 『각사등록(各司謄錄)』을 살펴보면, 여러 감영과 유수부에서 올린 보고서에는 측우기를 이용하여 측정한 우량 수치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각사등록』에 수록된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에 따르면, 통제영에서는 1871년에 9회, 1873년에 14회 측우기로 우량을 측정하고서 그 수치를 한양에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을 토대로 측우기 전문연구가인 한상복은 통영측우대가 187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참고로 1811년 제작설은 일본인 학자인 와다유지(和田雄治)가 주장한 것이다.
통영측우대는 아래 부분의 받침돌에 금이 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원래의 온전한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측우대 4기 중에서 받침돌이 함께 남아 있는 것은 통영측우대가 유일하다.
통영측우대는 원래 경상도 수군통제영에 있던 것을 1910년경 관측소(현 기상청)로 옮겨서 보관되다가 1972년부터 서울과학관에서, 2008년부터 국립중앙과학관 상설전시관 3층에서 보관, 전시되고 있다. 측우대를 구성하는 아래 부분의 받침돌에는 금이 가 있다. 한편 측우대 위에 원래 설치되어 있던 측우기는 행방불명인 상태이다.
통영측우대는 조선 후기 영조대에 이르러 세종이 발명한 측우기 제도를 다시 복원하고 전국적 차원에서 강우량을 측정하고 보고하는 체계를 다시 확립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