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

금강반야바라밀경
금강반야바라밀경
불교
문헌
문화재
전라도 남원에서 설사덕과 김영기의 주관으로 신지의 정서본을 판각하여 1363년에 간행한 불교경전. 판화본.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보물(1981년 03월 18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의
전라도 남원에서 설사덕과 김영기의 주관으로 신지의 정서본을 판각하여 1363년에 간행한 불교경전. 판화본.
개설

198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363년(공민왕 12, 지정 23)에 남원부사 설사덕(薛師德)과 판관 김영기(金英起)의 주관으로 신지(信之)가 글씨를 쓰고 법계(法戒)가 도상을 그렸으며, 신명(信明)과 법공(法空)이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하여 남원에서 간행된 판화본(板畵本) 금강경이다.

금강경은 2세기 무렵에 인도에서 결집된 이후 동아시아에 널리 유포되어 대승사상을 크게 현양한 경전이다. 결집 당시에 인도에서는 반야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지혜의 사상을 결집한 금강경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불자 사이에는 금강경을 매일 수지독송(受持讀誦)하게 되면, 누구나 동일한 공덕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해 있었다. 그리하여 이 경전을 항상 수지하여 독송하고자 하는 수행의식이 강조되어 대중들에 의해 널리 독송되었다. 금강경의 범어는 바즈라체디카 프라즈냐파라미타 수트라(Vajracchedika-parajnaparamita-sutra)이다. 인도에서 성립된 금강경은 그 후 중국에 전래되어, 402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의 한역(漢譯)으로부터 시작하여 703년에 의정(義淨)의 역출(譯出)에 이르기까지 300년 사이에 이른바 6종의 번역본이 완성되었다.

현재 금강경의 6역본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유통되고 있는 번역본은 바로 구마라집에 의해 처음으로 한역된 것이다. 중국에서 한역 금강경이 유포된 이후 양나라 소명태자가 32과분으로 분장(分章)하였고, 당나라 육조 혜능(慧能) 등에 의해 주해가 끊이지 않고 찬술되었다.

편찬/발간 경위

전후의 표지는 후대에 개장한 것으로 본문의 지질과는 사뭇 다르며,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복각본인 패엽사판(1564년)과 광흥사판(1570년)과 비교하여 권수부분 2절이 결락된 듯 금강경개청(金剛經啓請) · 진언문(眞言文) · 발원문(發願文) 등이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근래 이 책의 모본으로 보이는 판본이 경주의 왕룡사원의 불복에서 발견되었는데, 원나라에서 1338(至元4)년에 간행된 목판본이다. 그러나 남원본은 단순히 지원본(至元本)을 복각한 것이 아니라, 고려에서 새로 필사하고 도상을 그려 판각 간행한 것이다.

서지적 사항

목판본 1첩 절첩장이다. 판식을 살펴보면, 변란은 상하단변(上下單邊)으로 크기는 27.2㎝이며, 접은 한 면의 크기는 10.8㎝로 37절로 되어 있다. 장정의 형태는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접장본 형태로 되어 있으며, 표제는 ‘금강경(金剛經)’으로 묵서되어 있다. 판면의 구성은 상하단으로 구분하여 상단에는 육조의 구결 · 천로의 송 · 부대사의 찬과 해당 경문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도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단에는 경문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이 책의 권말에는 반야진언(般若眞言)과 보궐진언(補闕眞言)에 이어 왕실의 수명장수를 축원하는 발원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아래에 ‘지정이십삼년계묘팔월일 남원개판(至正二十三年癸卯八月日 南原開板)’이란 간기(刊記)가 새겨 있으며, 다음 해에 서원(書員)신지(信之), 화원(畵員) 법계(法戒), 각자(刻字) 신명(信明)과 법공(法空), 공덕주(功德主) 조송주(曹松柱), 근선(勤善) 각민(覺敏), 동원(同願) 이중순(李中順)과 정여(定如), 봉상대부지남원사(奉常大夫知南原事) 설사덕(薛師德) 판관겸권농사김영기(判官兼權農使金英起) 등 이 책의 개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차례로 기재되어 있다. 이 간행기록을 통해, 이 책은 공민왕 12년(1363)에 남원부사 설사덕(薛師德)과 판관 김영기(金英起)의 주관으로 원나라 판본을 저본으로 신지(信之)가 글씨를 쓰고 법계(法戒)가 그림을 그려 전라도 남원에서 간행한 불경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맨 끝에는 호법선신장도(護法善神將圖)가 수록되어 있어 한층 이 경의 장엄성(莊嚴性)을 돋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원본과 비교하여 비록 책머리의 일부가 일실되었으나, 핵심이 되는 내용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상이 수록되어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판본이다. 그리고 지방에서 개판되어 판각이 그다지 정교하지 못하고 인쇄 상태도 깨끗하지 못하나, 고려시대 판화가 수록된 경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참고문헌

「王龍寺院 三尊佛像의 腹藏典籍에 관한 硏究」(송일기, 『한국문헌정보학회지』 제42권 제2호, 2008.6)
집필자
송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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