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5월, 주1의 과도한 조세 수탈[세폐(稅弊)[^2]], 일부 천주교 신자들의 토속 신앙물 파괴[교폐(敎弊)] 등이 그 배경이 되고, 대정군 상무사(商務社)와 신자들의 충돌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를 우두머리로 하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때 주3은 제주성에 진입하기 위해 황사평(黃沙坪)에 주둔했다. 5월 28일, 민군이 제주성을 점령하고 그곳에 피신한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했다. 이때 약 300~350명의 신자가 희생되었다. 뒤이어 출동한 대한제국 정부의 진위대(鎭衛隊)가 민란을 진압하고 주동자를 압송해 갔다. 이 사건을 신축교안(辛丑敎案), 제주교안(濟州敎案), 제주교난(濟州敎難), 신축민란(辛丑民亂), 이재수의 난 등이라 한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은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 관덕정(觀德亭) 앞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희생자들을 위한 매장지는 사건 당시 문제 해결을 위해 제주도에 당도했던 프랑스 함장과 제주 목사 사이에 이루어진 약속에 따라 별도로 제공되어야 했다. 하지만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시신들은 매장지를 찾지 못하고 주4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주5. 이 문제는 천주교회와 대한제국 정부 간 협상을 통해 1903년 4월 29일경 황사평이 매장지로 결정되고, 9월 14일에 외부(外部)가 제주 목사에게 훈령(訓令)을 내려 “황사평을 천주교인 매장 주6로 확정하라.”라고 지시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때 연고가 있는 시신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간 상태였기 때문에, 1904년 11월경에 총 28구의 주7 시신이 황사평으로 이장되었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1903년에 제주본당의 라크루(Lacrouts, 구마슬(具瑪瑟), 18711929, 마르첼리노) 신부가 홍종우(洪鍾宇, 18501913) 제주 목사로부터 약 1만 8,000평에 달하는 황사평을 양도 받았을 때는 그곳에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천주교 신자의 시신만 매장하도록 했다. 1977년 9월 이래, 천주교 제주 교구는 황사평에서 매년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여 신자들의 순교신심(殉敎信心)을 고취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제주 교구 기념사업의 목적으로 황사평 묘역 주8를 추진하였다. 이에 무명 희생자(순교자)들의 묘역이 정비되고, 일반 신자들의 묘지 분양 신청도 받게 되면서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묘역 공원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1993년에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황사평 묘역의 성역화를 재차 추진하여, 신축교안 희생자 김 토마스와 라크루 신부의 주9 신재순(申才淳, 18841901, 아우구스티노)의 묘를 순교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이어서 초대 제주지목구장(濟州知牧區長)으로 활동한 헨리(Henry, 현해(玄海), 19091976, 하롤드) 대주교와 서귀포본당 등에서 주10 활동을 했던 라이언(Ryan, 나(羅), 19071971, 토마스) 신부, 저명한 성서학자 임승필(任承弼, 19502003, 요셉) 신부 등의 묘소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1995년에는 희생자들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주11를 조성하였다. 1998년 9월 20일에는 제주도 선교에 많은 공헌을 한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을 위한 주12 주13을 거행했다. 9월 27일에는 1866년에 경상남도 통영에서 순교한 복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 1816~1867)의 순교비 제막식을 가짐으로써 성지로서의 면모가 한층 정비되었다. 또한 2008년부터 황사평 부지에 납골당이 마련되어 신자들의 추모 공간으로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한편, 2022년 5월 29일 신축교안 120주년을 맞아 황사평에 '화해의 탑'을 설치하여, 제주 도민사회와 천주교회의 화해와 상생을 기원하였다. '화해의 탑'은 천주교 제주 교구와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2003년에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문'을 공동으로 발표하면서 설치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1901년에 발생한 신축교안으로 인해 희생된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묘지에서 출발한 황사평 성지는 1977년 이래 이곳에서 매년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오늘날 천주교 제주 교구 신자들의 순교신심 함양과 순교자 주14을 위한 대표적인 성지가 되었다. 또한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의 묘지 그리고 납골당이 들어서게 되면서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