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익 ()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서재의 여인」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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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서재의 여인」 등을 그린 화가. 서양화가.
활동사항

1895년에 태어나서 1925년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1922년에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우리나라 화가로는 고희동, 나혜석과 함께 「서재(書齋)의 여인(女)」으로 첫 입선을 하였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역시 「서재의 여인」으로 입선하였다.

1923년 정규익이 조직한 서울화회는 강진구(姜振九), 박영래(朴榮來), 정규익(丁奎益), 나혜석(羅惠錫) 등이 참가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와 함께 공동 작품 발표를 위한 그룹이었다. 그러나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한 번씩의 그룹전을 가졌을 뿐 작품전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였고, 1923년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고려화회의 제1회 서양화전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1월 4일 미술연구소인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을 개설하고 동양화의 김은호(金殷鎬), 허백련(許百鍊), 서양화의 강진국(姜振九), 이종우 등과 함께 미술을 지도하였다. 1924년 8월에는 고려미술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근원 김용준은 「생각나는 화우(畵友)」, 『근원수필』(1948)에 "석영, 향린과 함께 활약하던 분으로 정규익이란 이는 그때 모 관청에 직을 갖고 있으면서 퍽 재주 있는 화풍을 보여주던 작가였으나 오래 전에 벌써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쓰고 있다. 이른 나이에 요절했으나 재주가 있었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상훈과 추모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재(書齋)의 여인(女)」입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재의 여인」 입선

참고문헌

『20세기의 한국 미술 2: 변화와 도전의 시기』(김영나, 예경, 2010)
『한국 근현대 미술의 역사』1권 (최열, 열화당, 2006)
『한국근대미술연구』(이경성, 동화출판공사, 1974)
『한국근대미술산고』(이구렬, 을유문고, 1974)
『한국회화소사』(이동주, 서문당, 1972)
「한국 근대유화의 전개 양상」(윤범모,『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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