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에 태어나서 1925년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1922년에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우리나라 화가로는 고희동, 나혜석과 함께 「서재(書齋)의 여인(女)」으로 첫 입선을 하였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역시 「서재의 여인」으로 입선하였다.
1923년 정규익이 조직한 서울화회는 강진구(姜振九), 박영래(朴榮來), 정규익(丁奎益), 나혜석(羅惠錫) 등이 참가한 고려미술회(高麗美術會)와 함께 공동 작품 발표를 위한 그룹이었다. 그러나 서울과 인천에서 각각 한 번씩의 그룹전을 가졌을 뿐 작품전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였고, 1923년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고려화회의 제1회 서양화전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1월 4일 미술연구소인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을 개설하고 동양화의 김은호(金殷鎬), 허백련(許百鍊), 서양화의 강진국(姜振九), 이종우 등과 함께 미술을 지도하였다. 1924년 8월에는 고려미술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근원 김용준은 「생각나는 화우(畵友)」, 『근원수필』(1948)에 "석영, 향린과 함께 활약하던 분으로 정규익이란 이는 그때 모 관청에 직을 갖고 있으면서 퍽 재주 있는 화풍을 보여주던 작가였으나 오래 전에 벌써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쓰고 있다. 이른 나이에 요절했으나 재주가 있었던 화가임을 알 수 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재(書齋)의 여인(女)」입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재의 여인」 입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