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근교에서 태어나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해주사범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며 비평가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공훈예술가 및 평양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평양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1924년평양 상수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동경미술학교 도화사범과에 입학했다가 서양화과로 전과하였다. 1929년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와 해주사범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로 지내면서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양화부에서 「나부(裸婦)」와 다음해인 제9회 선전에서 「여인상」과 「풍경」으로 입선하였다. 그는 1933년 12회 선전에서 「이인(二人)」 으로 특선을 수상했다. 또, 선전비평을『조선일보』에 「혼란, 모순(混亂, 矛盾)」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다. 그리고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 개인전에는 농촌을 소재로 삼은 「농민」 등의 작품들이 나왔다. 이후 1944년까지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34년 선전에서 「휴게」로 무감사 특선에 창덕궁상을 수상하게 된다. 화가 김종태는 이 작품을 보고 회장을 들어가기도 전에 길가에서 걸어놓은 작품이 보인다고 호평을 하였고, 구본웅은 ‘색조와 골법’이 최고라고 칭찬하였다. 1935년 김복진과 선우담이 해주에서 만나 조선미술의 발전에 대해 논의했다. 1937년 해주에서 4인 전람회가 열렸다. 해주회관에서 조선일보 해주지국의 초대로 선우담, 오택경, 최정복, 우동화가 참가했다. 당시 내용을 참고해 보면 스승 선우담과 함께 제자들이 같이 전시회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1946년 북조선예술총련맹 황해남도위원회 위원장, 상무위원을 역임하고 같은 해 10월 북조선미술동맹위원장이 된 후 1948년 9월까지 역임하였다. 1950년 중앙미술제작소 소장을 지내면서 선전화를 그렸으며 1956 조선미술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 공훈예술가가 되었으며 1958년부터 1962년까지 평양미술대학학장을 지냈다.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나부」 입선(1929)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여인상」, 「풍경」 입선(1930)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이인(二人)」 특선(1933)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휴게(休憩)」 무감사 특선(창덕궁상)(1934)
제14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초부(樵夫)의 좌상」 무감사 입선(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