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남아 있는 원양장의 양식을 보면 조선 중기의 경공장 솜씨로 만들어진 것인데, 공주나 옹주의 혼수로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 광해 124권 10년 2월 2(임진)일 기사에 “공주나 옹주의 혼수는 사대부의 예에 따른다” 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대부가에서도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3층장의 형태로 3층 중 한 층에 두 쌍의 여닫이문이 있고, 그 안은 잠금장치가 있는 여러 개의 서랍이 달린 가께수리를 설치하여, 각층마다 한 쌍의 여닫이문이 있는 일반 장과는 구별된다. 또 서랍은 외면 바닥에 두석제의 혀를 달아 서랍을 닫으면 긴 혀가 쇠목에 닿아 열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서랍을 열기 위해서는 아래의 장문을 열고 쇠목에 걸쳐있는 혀를 위로 올린 후 열도록 제작되었다.
재질은 무늬가 뚜렷한 느티나무 용목(龍目)에 오동나무를 부판(付板: 두개의 널을 붙여 하나의 널로 만듦)하여 전면(前面) 알갱이를 만들어 자연적인 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뒤틀림을 방지하였다. 기둥은 단단한 느티나무를 주로 사용하였고, 옆널과 뒷널 등을 오동나무를 사용하여 해충을 방지하고 장의 무게도 줄였다.
원앙장은 공주나 옹주 또는 부유한 사대부가의 혼수였으므로, 부부해로하고 많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배려로 제작된 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