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는 1604년(선조 37) 6월에 임진왜란 때 공헌이 있는 신하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선무공신·청난공신 등 세 종류의 공신을 녹훈하고,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공신으로 녹훈된 이들에게 교서를 발급하였다. 이 중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 때 임금과 세자를 호종한 신하에게 내린 칭호이며, 이들에게 공훈에 따라 등급한 사실을 문건으로 내린 것이 교서이다.
호성공신은 1등에 이항복(李恒福) 등 2인, 2등에 유성룡(柳成龍) 등 31인, 3등에 허준(許浚) 등 53인이 녹훈되었다. 이때 86인에게 내린 교서 중 김응남, 박숭원, 심대, 유성룡, 이공기, 이헌국, 이충원, 홍진에게 반사한 교서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은 2등 공신의 열일곱 번째에 책록되었다.
공신에 녹훈된 사람은 본인의 이름과 등급이 기재된 녹권과 교서가 반사되었다. 이러한 녹권과 교서의 발급은 한시적으로 설치된 공신도감에서 주관하여 시행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가면서 정공신에 대해 녹권의 발급이 중단되고 교서만 반사되었다. 그런데 박동량의 후손 가에서 보존하고 있는 호성공신 교서는 『호성공신도감의궤(扈聖功臣都鑑儀軌)』에 수록된 교서와 비교하면 글자의 출입이 있고, 원본 교서에서 2등 공신에 정원군(定遠君) 이부(李琈)라는 이름으로 책록된 내용이 이 교서에서는 정원군의 아들 인조가 등극한 이후 1632년(인조 10)에 추존한 이름인 ‘원종 대왕(元宗大王)’으로 별행(別行)하여 기재하고 있어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박동량교서는 1604년(선조 37)에 발급된 원본이 아니라 후대에 일정한 절차를 거쳐 재발급된 교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서의 발급일시 아래에 박동량에게 반사한 원본이 병자호란으로 망실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을 반사할 때 안보(安寶)를 추급한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 교서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보사공신을 녹훈한 1680년(숙종 6)에 재발급한 것이다.
1680년(숙종 6)에 재발급한 교서로 두터운 종이에 붉은색으로 계선과 변란을 그리고 해서로 정서하였으며, 끝에는 목축(木軸)을 달아 권자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원본 교서는 비단 겉면과 안면의 표장, 축두(軸頭)의 형태, 축을 묶는 색실띠[多繪帶]와 상아침(象牙針) 등으로 제작되어 있는데 비해 종이에 쓰여 있어 재발급한 교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표제는 비단에 해서로 ‘호성공신이등박동량(扈聖功臣二等朴東亮)’이라 제첨을 묵서하여 붙였고, 중간의 후면 별지에 ‘이춘영제(李春英製)/박태만서(朴泰萬書)’라고 두 줄로 써서 붙였다. 이 공신 교서가 선조에서 광해군 연간에 문장으로 이름난 이춘영이 짓고, 후손 박태만(朴泰萬 , 1642∼1689)이 쓴 것임을 보여준다.
교서의 내용은 먼저 박동량의 공적을 기술하고, 이어서 호성공신 2등으로 책봉한다는 것과 그에 따른 포상으로 본인과 부모·처자의 벼슬을 2계(階) 씩 올려주고, 자식이 없으면 조카나 여자 조카에게 1계씩을 올려 주며, 적장자에게 벼슬의 지위를 세습하게 하며, 노비(奴婢) 9구, 전(田) 80결(結), 은자 7냥, 표리(表裏) 1단(段), 내구마(內廐馬) 1필(匹)을 하사한다는 상사(賞賜)의 내용을 차례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등급에 따라 기재한 공신 86명의 명록(名錄)과 교서의 반급 시행일인 ‘만력삼십이년십월일(萬曆三十二年十月日)’을 기재하는 순서로 되어있다. 발급 연월의 위에는 어보(御寶)인 「시명지보(施命之寶)」가 날인되어 있다. 교서의 발급일 아래에 작은 글씨로 “교서본축 일어병자병선 금인보사공신반축시 의구공신례 안보추급(敎書本軸佚於丙子兵燹今因保社功臣頒軸時依舊功臣例安寶追給)”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1604년(선조 27)에 반급(頒給)한 호종공신의 교서를 병자호란에 분실하여 보사공신(保社功臣)의 공신교서축을 반급할 때에 절차에 따라 안보를 추급하여 재발급한다는 내용이다. 재발급 교서는 박동량의 증손자인 박태만이 정서하여 추인을 받았다.
공신 교서 원본을 분실한 경우 자손이 이를 다시 제작 제출하여 안보를 요청하면 추급하는 사례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보이고 있다. 비록 이 교서는 1604년(선조 27)에 반급된 원본 교서가 아니지만, 후대에 재 발급된 교서의 실물자료가 흔히 보이지 않고 있어 이러한 실례의 하나로 생각된다. 이처럼 재 발급된 교서의 실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문서 발급 및 관리 양상을 살필 수 있는 실물 자료라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