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답 양안은 토지에 대한 기본 자료로서 전답의 도형, 면적, 등급 및 그에 따른 결부수, 그리고 소유자와 경작자[소작인]를 모두 기재하고 있다. 양안 작성의 기본 목적은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의 근거와 조세, 소작 등 수조권(收租權)의 확보에 목적이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20년마다 양전의 실태조사를 시행하여 양안을 다시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사업 자체가 비용이 많이 소요되므로, 실제적으로 거의 100년에 걸쳐서 양전 조사가 실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성 용주사 소장의 「기미 양안(己未量案)」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으며, 동일한 성격의 「별본 양안(別本量案)」은 기미 양안에 비하여 상태가 좋지 않다. 하지만 2건의 양안은 모두 왕실 의궤의 장황법에 준거하여 만들어졌으며, 조선 후기 왕실의 능찰인 용주사의 토지 소유 실태 및 각 전답에 대한 소작인과 결부수(結負數)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2012년 3월 26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용주사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기미본은 권수에 ‘가경사년기미(嘉慶肆年己未)’라고 작성한 기록으로 보아, 1799년(정조 23)에 작성되었된 것이라 생각된다. 반면 별본은 작성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별본 양안」이 정서로 작성되어 있어 용주사가 창건된 1790년(정조 14)과 가까운 시기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용주사 소장 2건의 전답 양안은 일반적인 양안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표지를 보면 「기미 양안」은 물론 「별본 양안」도 모두 녹색 마포를 사용하였고, 무쇠로 만든 변철, 동자못, 고리를 사용하여 장책하였다. 그리고 「기미 양안」은 두터운 장지(壯紙)를 사용하고 있는데, 주로 조선 후기 궁중에서 의궤에 사용한 종이와 동일하다. 특히 「기미 양안」은 원래 표지를 유지하고 있어서 장황(裝潢)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다만 표지의 제목을 표시한 첨지는 매우 낡아서 글자가 없어졌고 내용 중 일부 낙장도 있다. 반면에 「별본 양안」은 표지는 물론 내용의 일부가 손상되어 있다. 이러한 장황 방식은 주로 왕실의 의궤에 적용되고 있는데, 용주사 전답 양안이 의궤 방식으로 장황되어 있는 것은 당시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보인다. 「기미 양안」의 크기는 49×32㎝이며, 「별본 양안」의 크기는 51×31㎝이다.
이 자료는 조선 후기 화산 용주사에서 소유하고 있던 전답의 실태를 기재한 원부이다.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에 사도세자의 능원인 현륭원(顯隆園)의 원찰로서 중건된 사찰이다. 본래 이 절은 854년(신라, 문성왕 16)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였으나, 952년(고려, 광종)에 소실된 이후 폐사되었다가 조선 제22대 정조가 그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으로 옮기면서 중창하여 원찰로 삼았다.
전답 양안은 정간(井間)을 만들어서 기록한 것으로 정간의 내용은 일반적인 양안과 대체적으로 비슷하다. 양안의 구성은 면 단위로 되었고, 하나의 면이 끝이 나면 해당 면의 결부수와 정조의 통계가 계산되었다. 단위별 토지는 모두 7칸(별본은 8칸)의 정간에 상세한 내역을 표시하였다.
첫 번째 칸에는 자호(字號)가 있다. 자호는 양전(量田)의 단위(5結)를 천자문의 순서로 표시한 것이며, 제1· 제2· 제3의 지번은 자호 안에서 필지의 순서를 나타낸 것이다. 이 칸의 바로 아래에 지번(地番), 양전 방향(量田方向), 토지등급(土地等級), 지형(地形) 등이 기재되었다. 등급은 1∼6등이며, 지형은 방답(方畓) · 직답(直畓) · 제답(梯畓) · 고답(股畓) 등으로 구분되었다.
양전 방향은 남법(南犯) · 북범(北犯) 등의 표기로 나타내는데, 남범은 북에서 남으로 북범은 남에서 북으로 양전을 실시하였음을 표시한다. 그리고 바로 아래 칸에는 토지의 배미[夜昧] 수가 기재되었고, 세 번째 칸에는 장광척(長廣尺)이 기재되었는데, 동서장(東西長) · 남북광(南北廣)의 척수(尺數)는 지형의 실제 거리를 양전척으로 측량하여 표시한 것이다. 네 번째 칸에는 결부수(結負數)가 기록되었는데, 지형의 실제 면적을 준정 결부법(准定結負法)에 의해서 등급별로 계산하여 얻어진 전답의 넓이로서 전결에 대한 세의 부과는 이것이 기준이 된다.
다섯 번째 칸에는 해당 토지의 정조(正租), 도조(賭租), 세조(稅租)가 구분되어 표기되었는데, 위의 결부수를 기준으로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여섯 번째 칸에는 사표(四標), 즉 해당 토지의 위치가 기재되었고, 마지막 칸에는 현재의 경작자 등이 표기되어 있어서 다른 양안의 내용보다 훨씬 상세하다. 특히 해당 면이 끝이 나면 전체 토지의 크기와 세액을 통계치로 제시하였으며, 기미본에는 결부법이 아니라 평수로 토지를 계산한 첨지가 붙어 있어서 일제강점기 정보제(町步制)가 실시될 때까지 사용된 장부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해당 토지의 소용이 제전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융건릉의 제사를 용주사에서 담당하고, 그 재원이 표기된 것이다.
위의 두 양안은 양안에 수록되어야 할 대부분의 사항이 모두 기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양안보다도 더 자세하다. 내용이나 작성 상태 등을 보면, 기미본보다 별본이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별본에는 겸사(兼使)의 수결이 있고, 기미본에는 겸총섭(兼總攝)인 철학(哲學)의 수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양안의 작성 및 관리 책임이 정조 때 이미 지방관에서 용주사로 이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작성 상태는 두 본 모두 각각 동일인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기미 양안」 보다는 「별본 양안」이 더욱 해정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작성 내용도 「별본 양안」이 더욱 정확하고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어 시기적으로 두 양안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용주사가 창건된 1790년(정조 14)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주사 전답 양안은 조선 후기 사원전(寺院田)의 운영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양안과는 달리 왕실 의궤에 사용한 초록색 마포에 무쇠로 장황하여 왕실과의 관련된 문건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양안은 정조 연간의 용주사의 토지 내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2건의 양안 사이에 일정한 시차가 있고 많은 부전지들이 붙어 있어 용주사 토지 운용 내역과 해당 지역의 소작 상황을 살피는데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