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령사 ()

정치
단체
1923년 4월 재일한인 박열(1902~1974) 등이 만든 항일운동 단체.
정의
1923년 4월 재일한인 박열(1902~1974) 등이 만든 항일운동 단체.
개설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인 박열과 그의 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등이 1923년 4월경 한인 14명과 일본인 5명 등을 규합해 만든 사상단체로서 그 해 9월 일제는 대역사건을 일으킨 비밀결사로 지목하여 이들을 모두 체포하였으나, 대부분 면소되었다.

연원 및 변천

1919년 가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고학생활을 하던 박열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의 양심적 사회운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1921년 11월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를 결성하였다. 하지만 1922년 10월경 김약수 · 김종범 · 백무 등 유학생 출신 회원들과의 이념논쟁을 거쳐 박열과 홍진유(洪鎭裕) 등 고학생들은 아나키스트들만의 단체인 풍뢰회〔風雷會, 흑우회(黑友會)로 개명〕를 결성하여 분화하였다.

박열은 이들 흑우회 활동과는 별도로 1923년 4월 도요타마군〔豊多摩郡〕 요요기〔代代木〕 자신의 2층 셋방집에서 불령사를 별도로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동거녀인 가네코 후미코와 홍진유 · 육홍균(陸洪均) 등 한인 15명과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 ·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등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이다. 박열은 불령사를 특정한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 대중단체로 만들려 하였다. 이에 따라 불령사에 가입하려는 회원은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하며, 탈퇴할 경우 전 회원 앞에서 의사를 밝혀야 했다.

한편,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그 해 9월부터 약 한 달간 박열과 불령사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일본검찰은 불령사 회원 전원을 기소하면서 불령사가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단체’라 규정하였다. 나아가 이를 ‘대역사건’으로 비화시키고 ‘불령사사건’이라 칭하였다. 박열은 일본검찰에 자신의 폭탄유입계획을 폭로하면서 불령사와 무관함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중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불령사 회원들은 예심종결과 함께 1924년 6월 모두 방면되었다.

의의와 평가

불령사는 박열 · 홍진유 등 흑우회 회원을 비롯해 일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대중지향적 항일운동을 전개한 단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6천명 이상을 학살한 일제는 이 단체를 폭동을 계획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했다. 학살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일제의 계획은 사건의 진실이 드러남에 따라 실패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김명섭, 이학사, 2008)
『식민지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야마다 쇼지 지음·김선태 옮김, 산처럼, 2003)
『한국의 아나키즘』(이호룡, 지식산업사, 2001)
『한국아나키즘운동사』(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형설출판사, 1978)
『金子文子‧朴烈裁判紀錄』(黑色戰線社 編, 東京:黑色戰線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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