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홍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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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흑우회, 불령사 등의 조직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0년 10월 1일
사망 연도
1983년 7월 5일
본관
옥천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善山: 지금의 구미시)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흑우회, 불령사 등의 조직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였으며 해방 이후,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 독립운동가.
내용

1900년 10월 1일 경상북도 선산 출생으로, 부친은 육병형(陸炳亨)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에 입학하였다.

1922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비밀결사 흑우회(黑友會)에 가입해, 회지 『흑우』와 『소작농』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23년에는 박열(朴烈), 김중한(金重漢) 등과 함께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가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1926년 10월 흑우회가 흑색청년연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할 때 참여하였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협동조합 ‘우리살림사’를 조직하였고, 옥성농우회(玉城農友會)를 통해 지역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39년 4월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났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6년 2월 발족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선산군 지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선산 지역구에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제헌국회 총선에 가장 많은 수의 후보를 내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하였다.

제헌국회의 세력 분포는 구 한민당과 대한국민당을 병합한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파와 동성회(同成會)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 그 중간을 점하는 신정회(新政會) 및 무소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육홍균은 한민당에 대한 반발 세력으로 구성된 비 한민 세력의 규합체인 동성회의 소장파 의원들이 만든 37의원(三十七議員)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50년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여 경북 선산 지역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3년 5월 동지회 지도위원을 지냈으며, 1969년에는 토지개량조합연합회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농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72년 11월 20일 제헌동지회 소속 제헌의원 53명 중 한 명으로 10월 유신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데 참여하였다.

1983년 7월 5일 자택에서 향년 83세로 사망하였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고, 1990년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육홍균 대구지검 형사사건부」(대구지검, 국가기록원 소장, 1939)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오장환, 국학자료원, 1998)
『대한민국 의정총람』(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
『동아일보』(1983.7.6)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www.mpva.go.kr)
집필자
김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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