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을 증진해 한인들 간의 단결과 우의를 도모하고 공동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Oakland Korean Methodist Church)의 첫 시발은 1914년 6월 5일 오클랜드지방에 거주하던 문원칠과 조성학의 주선으로 문원칠의 상점에서 남감리교 순행 목사 황사용을 청하여 예배를 가지면서 이루어졌다.
문원칠은 당시 웹스터가(Webster Street)의 7가와 8가 사이에 작은 식료품상을 하고 있었는데, 개인집이 딸린 이 상점에서 첫 예배를 시작하였다. 초대 목사는 황사용 목사이고 출석 교인은 8명이었다.
1917년 8월 10일 예배처소를 조성학의 집으로 이전하고, 안젤모신학교에서 공부한 임정구(1887년생, 1911년 포모나대학 입학 후 버클리대로 편입)를 2대 교역자로 청빙하였다.
1922년 당시 20여 명의 교인이 있었고, 그 해 2월 8일 임정구의 집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였다. 임정구는 1927∼1930년 퍼시픽신학교(Pacific School of Religion)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았는데, 1929년 미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후 오클랜드교회는 남감리교단 소속의 정식 교회로 인정받았다.
1938년 12월 20일 처음으로 자체 건물을 마련해 헌당식을 가졌다. 임정구는 1939년 12월 23일 54세로 별세할 때까지 22년간을 한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교회의 기반을 닦았다.
1942년 해리슨가(Harrison Street) 520번지로 이전한 후 도로 확장으로 헐리게 되면서, 1951년 4월 30일 맥아더거리(McArther Boulevard) 359번지로 다시 이전하였다.
해방 이전까지 교인수는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70여 명에 달했다. 1950∼60년대에는 한 때 교회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교인수가 크게 줄었다가, 1973년 김광진 목사 부임 이후부터 부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Oakland Korean United Metho. Church)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교역자로 활동한 인물은 해방 이전까지 황사용, 임정구, 노신태, 장기형, 박용학, 이진묵, 김태묵, 임두화 등이고 해방 이후부터 김창수, 김광진, 김종원, 김현일, 김무열, 이강원 등이다.
한인교회로서 기독교 신앙을 양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총회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와 가까워 대한인국민회 주도의 한인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동 참여하였고, 미주한인의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오클랜드한인연합감리교회(Oakland Korean United Metho. Church)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