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돈 대한제국공사관 ( )

근대사
유적
미국 워싱턴 DC 워싱턴(Washington) 로건 서클(Logan Circle)에 있는 대한제국기 에 설치된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이칭
이칭
대조선주차미국화성돈공사관(大朝鮮駐箚美國華盛頓公使館), 주미조선공사관, 주미한국공사관
정의
미국 워싱턴 DC 워싱턴(Washington) 로건 서클(Logan Circle)에 있는 대한제국기 에 설치된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개설

최초의 정식 명칭은 대조선주차미국화성돈공사관(大朝鮮駐箚美國華盛頓公使館)이다. 1887년 1월 주미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은 미국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후 워싱턴 시내 북서(北西) 오가 1513번지(1513 O St. NW)의 건물을 빌어 공사관을 설치하고 외교업무를 개시하였다. 이어 1889년 2월 대리공사 이채연(李采淵)은 북서 13가 1500번지(1500 13th street NW, 현 Logan Circle 15번지) 소재 단독건물을 임대해 공사관을 옮겼으며, 1891년 2월 1일 이 건물을 구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한국공사관을 폐쇄시켰으며, 주미 일본대사는 1910년 6월 단돈 5달러로 공사관 건물을 양도받은 뒤 한국을 병탄한 직후인 8월 31일 미국인 풀턴(Horace K. Fulton)에게 1만 달러[장부 가격 10달러]에 팔아 넘겼다.

2012년 8월 문화재청은 문화유산국민신탁을 주체로 내세워 350만 달러에 외관이 보존되어 있는 공사관 건물을 매입하였고, 현재 건물 내부의 원형을 복구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적 변천

1888년 1월 17일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은 백악관에서 미국대통령 클리브랜드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으며, 1월 19일 워싱턴 디씨 북서 오가 1513번지 소재 건물을 빌어 대조선주차미국화성돈공사관을 개설하고 외교업무를 개시했다. 청국의 압력으로 박정양 공사가 귀국한 후 1889년 2월 13일 대리공사 이채연(李采淵)은 북서 13가 1500번지(1500 13th street NW, 현 Logan Circle 15번지)의 건물을 임대해서 공사관을 옮겼으며, 1891년 11월 28일 고종의 내탕금 2만 5천 달러로 이 건물을 미국인 브라운(Sevellon A. Brown)에게 매입해서 12월 1일에 등기를 마쳤다.

그러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요해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주미한국공사관을 비롯해 해외주재 공사관을 모두 폐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1905년 12월 30일 대리공사 김윤정은 을사늑약에 의거해 주미공사관을 폐쇄한다는 12월 14일부 외부대신 이완용 명의의 훈령에 따라 한국 공사관이 보관하던 기록, 문서와 관유재산 일체를 일본공사관에 인계하였다. 1906년 1월 29일 김윤정은 공사관원 및 가족과 함께 귀국함으로써 마침내 주미공사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그 뒤 일제는 주미공사관 건물을 한국정부 소유로 간주하여 대지, 건물, 집기 등을 인수·관리하라고 지시하였다. 그후 일제의 국권강탈이 이뤄지기 직전인 1910년 6월 29일 주미일본대사 우치다(內田康哉)는 단돈 5달러로 주미공사관 건물을 대한제국으로부터 양도받았다. 이 양도 문서는 서울주재 미국 부총영사 굴드(Ozro C. Gould)가 공증한 것으로, 고종과 당시 궁내부차관 미지마(三宮三保松), 그리고 조민희 등의 날인이 들어 있다. 국권강탈한 직후인 9월 우치다는 미국인 풀턴(Horace Fulton)에게 1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그러나 당시 매도증서에는 가급적 매도가격의 기입을 피하는 워싱턴 디씨의 10달러를 받고 매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공사관 매도 금액은 우치다에 의해 일본 외무성으로 송금된 뒤 조선총독부로 인계되었다.

내용

갑신정변 후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1887년 8월 조선은 내무부 협판 박정양을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대외적으로 자주국임을 천명하였다. 박정양을 비롯한 주미전권공사는 공사관 옥상에 국기(태극기)를 게양하였을 뿐 아니라 공사관 내부에도 국기를 걸어놓음으로써 자주의식을 과시하였다. 또한 공사·참찬관·서기관·번역관 등으로 구성된 공사관원들은 공사관을 거점으로 자주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과 국가재정의 빈약으로 공사관원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고 운영자금도 부족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을사늑약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특징

최초의 공사관 건물은 부근에 새롭게 도로가 나면서 공사관의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가 힘들지만, 그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곳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 공사관은 빅토리아풍의 외양을 지닌 3층(지하실 별도) 건물로 본래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 이 공사관 건물은 천장이 넓고 9개의 커다란 방이 있었는데, 1층은 공식 업무용이고, 공관직원과 그 가족들이 2·3층에 기거하였다.

의의와 평가

주미공사관은 서구 국가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사관으로서 대외적으로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천명한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을사늑약 강요로 외교권이 박탈됨과 동시에 주미공사관도 폐쇄되고 말았다. 더욱이 1910년 8월 일제의 한국병탄과 더불어 주미공사관 건물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매각되었다. 따라서 주미공사관은 건물 자체가 망국의 슬픔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대한제국의 해외공관-일본외무성 기록-』(홍인근, 나남, 2012)
『개화기 한미 교섭관계사』(김원모, 단국대학교출판부, 2003)
『친미개화파연구』(한철호, 국학자료원, 1998)
집필자
한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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