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수 ()

목차
관련 정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김낙수(金洛洙)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0년 1월 19일
사망 연도
1919년 6월 2일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
대표 상훈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국장
내용 요약

김낙수는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울산군 상등면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울산군 언양 장날 만세시위는 언양 천도교인과 유림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김낙수는 시위 현장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으며, 시위는 일제의 발포에 투석전으로 맞서는 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주요 활동

1919년 4월 2일 경상남도 울산군 언양읍 언양 장날, 천도교 언양교구 교인들과 주1 인사들 주도로 1,0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낙수는 경상남도 울산군 상등면 출신이다. 천도교 언양교구장 김교경(金敎慶)은 경성의 고종 주2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독립신문』 등을 보내왔다. 이에 전임 교구장 최해규(崔海圭) · 최해선(崔海璇) 형제 등 천도교인 7명과 이무종(李武鍾), 이규인(李圭寅) 등 유림계 인사들이 4월 2일 언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거사 이틀 전인 3월 31일 최해규 · 최해선 형제와 곽해진(郭海鎭) 등 지도부 인사들이 경찰에 예비검속을 당하여 위기를 맞았으나 석방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만세시위 계획을 전해들은 김낙수는 4월 2일 언양 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낙수는 “조선인이면 누구라도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고무하며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일본 경찰이 발포로 대응하자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섰으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해산하였다. 김낙수는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6월 2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김낙수 제적등본」

단행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국가보훈처, 197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국가보훈처, 1971)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주석
주1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    우리말샘

주2

태상황, 황제, 황태자, 황태손과 그 비(妃)들의 장례. 또는 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 비(妃)들의 장례    우리말샘

집필자
이정은((사)3.1운동기념사업회)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