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성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의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아우내 시장에 모여 시위를 전개하였고,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데 참여하다가 일본 군경의 총격을 받아 다음날인 4월 2일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천안군 성남면(城南面) 출신이다. 1874년 10월 2일 태어나서 1919년 4월 2일 사망하였다. 방치석(方致錫) · 방성규(方聖圭)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제히 일어났다. 3월 13일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3 · 1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유관순(柳寬順)과 유예도(柳禮道)는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로 귀향하였다.
그들은 천안군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으며, 그 생각을 전해 들은 유중권(柳重權), 유중무(柳重武), 김용이(金用伊), 조인원(趙仁元), 조병호(趙炳鎬),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東奎), 이백하(李柏夏), 이순구(李旬求) 등은 병천리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에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 아우내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만세시위 주동자들은 시장에 모인 군중 500~6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이끌었다. 방치성은 시위대의 일원으로 시장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아우내시장에 인접한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은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고 총검으로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군경의 발포와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해산하였다. 시위대는 시위로 사망한 인사들의 시신을 운구하여 헌병주재소로 가서 주재소장과 헌병들에게 무력 진압으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일본 군경의 해산 요구를 거부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에서 헌병 하사와 천안철도 엄호대장 및 군인들이 아우내시장으로 출동하였다. 시위대는 출동한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에도 불구하고 해산하지 않고 주재소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 밖에 시위대는 천안과 병천을 연결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신주 1개를 쓰러뜨렸으며, 면사무소 입구 미닫이를 파괴하였다.
방치성은 일본 군경의 발포와 무력 진압 과정에서 총격을 당하였으며 다음날인 4월 2일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