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순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리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아우내 시장에 모인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군경의 발포로 총상을 입었고 1920년 8월 11일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1885년 1월 3일 태어났다. 1920년 8월 11일 사망하였다. 서병순(徐秉淳)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만세시위가 일제히 일어났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서울의 3 · 1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로 귀향한 유관순(柳寬順)과 유예도(柳禮道)는 천안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의 생각을 전해 들은 유중권(柳重權), 유중무(柳重武), 김용이(金用伊), 조인원(趙仁元), 조병호(趙炳鎬),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한동규(韓東奎), 이백하(李柏夏), 이순구(李旬求) 등은 병천리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경,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리(竝川里) 병천[아우내]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서병순(徐秉舜)은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시장에 모인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최초 500여 명에서 시작한 시위대의 규모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병천 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은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일제히 발포하였고, 서병순은 현장에서 총상을 입었다. 일본 헌병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는 일시적으로 해산하였지만, 유중무 등이 일본 헌병의 총칼에 찔린 유중권을 업고, 다른 시위대들도 사망한 시위대원들의 시신을 운구해서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병천 헌병 주재소에서 시위대는 일본 헌병의 무력 진압에 따른 사상자 발생을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오후 4시경 천안에서 출동한 헌병대 및 군인들이 아우내시장으로 가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였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고 일본 군경에 맞서 헌병 주재소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병순은 일본 군경에 의해서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상처가 깊어서 일단 귀가한 상태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청에서는 소위 「소요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벌금 20원 노역장유치(勞役場留置) 20일을 선고하였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하였다. 1920년 8월 11일 만세 시위에서 입은 총상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