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진 ()

개신교
인물
대한제국기 자유교회 창설자인 목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0년(고종 7)
사망 연도
1940년
출생지
전라북도 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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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대한제국기 자유교회 창설자인 목사.
생애 및 활동사항

1870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정읍에서 성장하였으나, 가족을 이끌고 순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894년 동학동민군의 지도자였던 매부를 따라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여 매부가 처형되면서 농민군이 해산되자 그 후 최중진은 미남장로회 선교사 테이트(L. B. Tate)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교하고, 그의 조사(助事)가 되어 김제 · 정읍 · 태인 · 매계 등 테이트 선교구역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04년 매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고, 같은 해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1909년 9월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읍, 태인 등지의 교회에 니즈벳(J. S. Nisbet) 선교사와 동사 목사로 임명되었다.

최중진은 태인, 매계, 정읍 지역 교회를 돌보다가 그 지역에서 선교하는 미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지나치게 세례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선교 재정의 사용에도 지역적 차별을 두는 것에 불만을 품고, 5개항의 개선 요구 편지를 보내고 만약 그 가운데 한 항목이라도 거부하면 자신은 독립하겠다고 통고하였다. 5개 요구 조항은 ① 원입교인에 대한 엄격한 규율을 폐지하고 학습인으로 세워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할 것, ② 군산지방으로 편입시킨 부안지방을 자신의 지역으로 돌려주고, 고창지방도 자신에게 맡길 것, ③ 자신의 지역에 중등학교를 세워 교육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 ④ 교회마다 상구위원(常救委員) 2인씩을 두어 구제할 것, ⑤ 자신에게 집 한 채를 사주어 선교 사업에 재정적 어려움이 없도록 할 것 등이었다. 1910년 1월 5일에 열린 전라북도대리회는 최중진이 불참한 가운데 이 문제를 토론하고 이 일은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로 정죄하여 1월 25일 열릴 대리회에 출석하여 해명하고 대리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당회권리를 행사하지 말라고 1월 7일자로 통지하였다. 그러자 최중진은 1월 10일자로 “대한예수교 자유회 목사 최중진”의 명의로 반박 답장을 보내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대리회에서는 김필수 목사, 맥커천(L. O. McCutchen) 선교사, 서영선 장로 등을 파견하여 권면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2월 22일 임시대리회를 열어 회개하기까지 “휴직” 처분을 결의하고 같은 해 9월에 열린 제4회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독로회)에도 보고하여 “혁직(革職)”을 결의하였다.

그 후 최중진을 따라 장로회에서 탈퇴한 교회들은 일본조합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최중진은 동생 최대진 목사와 여러 동역자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1914년 8월 제4회 전라노회 계속회에서 노회원들 앞에서 회개하고, 10월 계속회에서 강도사로 강등하여 다시 임명되었지만, 1년이 못되어 다시 자유교회를 이끌고 장로회를 떠났다. 그 후 1910년대 후반 정읍, 전주, 개성의 조합교회 목사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1919년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조합교회에서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20년대 전반기에는 형평운동과 노농총동맹에도 참여하였고, 조선일보 정읍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1927년 4월 신간회 정읍지회 설립 준비위원, 동년 7월에는 정읍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70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전북노회회의록』(대한예수교장로회 전북노회, 2000)
『호남선교 100년과 그 사역자들』(김수진, 도서출판 고려글방, 1992)
「1910年代, 崔重珍の自由敎會とその周辺」(裵貴得, 『전북사학』40, 2012)
「日本組合基督敎會の朝鮮傳道に關する硏究」(姜信龍, 同志社大學大學院神學硏究科, 1993)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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