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기독교인 ·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이진규(李盡珪)
인물/근현대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 7월 22일
사망 연도
1926년 1월 24일
출생지
서울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내용 요약

이신규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의 3 · 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양평군 양근리 시장에 도착하여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군중에게 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보안법」 위반 협의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6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기독교인 ·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서울 숭인동에서 1899년 7월 22일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3 · 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서기(書記)로 재직하였다. 이진규(李盡珪)라고도 한다.

주요 활동

1919년 3월 24일, 독립선언서와 ‘대한독립회(大韓獨立會)’ 명의로 된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서울을 출발하여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 도착하였다. 이날은 양근리 장날로 1,000여 명의 장꾼들이 시장에 모여 있었다.

시장 근처 큰길가에 자리 잡고, “조선 민족은 이 기회를 틈타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할 수 있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면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장을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고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오후 2시가 넘어섰을 때 일제 헌병이 나타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양평 헌병 분견소(分遣所)로 강제 연행하였는데,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헌병 분견소 앞에 모여들어 체포자를 석방하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소한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26년 1월 24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국가보훈처, 1971)

신문 · 잡지

『동아일보』(1926. 11. 25.)

판결문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 7. 9.)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집필자
이가연(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