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장 ()

전통교육
제도
조선시대 이후 글방 학생, 보부상, 동학 교구 등의 무리인 접(接)의 우두머리.
이칭
이칭
접주(接主)
내용 요약

접장(接長)은 조선시대 이후 글방 학생, 보부상, 동학 교구의 무리인 접(接)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전통교육에서 접장은 훈장이 출타했을 때 학동 중에서 나이가 많고 실력이 있는 자로 훈장을 대리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으며, 동학에서는 특별히 접주(接主)라고도 하였다.

정의
조선시대 이후 글방 학생, 보부상, 동학 교구 등의 무리인 접(接)의 우두머리.
내용

원래 접이란 '글방 학생들이나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 등짐장수들의 동아리, 동학의 교구 또는 집회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채소나 과일 백 개를 ‘한 접’이라 하는 것처럼 접장이란 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이른다. 서당에서 접장은 연령과 학력이 우수한 학동 중에서 훈장을 대신할 만한 사람을 세우게 되는데, 훈장 출타 시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등 접장은 자신이 훈장에게 배우는 동시에 자기보다 뒤떨어지는 학동을 가르치고 지도하기도 하였다.

변천 사항

황현의 『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갑오년(1894)에 동학도들이 서로를 접장이라 불렀는데, 세속에서 접장은 문사(文士)를 일컫는 말'이라 하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당시 한 무리를 이끄는 접(接)의 우두머리를 특별히 접주(接主)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접의 규모는 대략 60~70명으로, 접원(接員)이 백 호를 넘으면 두 접으로 나누는 것이 상례라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노소 귀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존대하는 평등의 용어로 ‘접장’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국궁 활터에서는 한 순 5발의 화살을 모두 과녁에 맞히는 몰기를 한 사람을 대접해서 ‘접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의의 및 평가

접장이 한 무리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며, 특히 글방 학동이나 유생들의 우두머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기원은 고구려의 조의선인(皂衣先人)이나 신라화랑도(花郞徒)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동학교도들이나 전통 활터에서 접장이라는 표현을 서로 존대하는 평등의 용어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단행본

피정만, 『20세기 서당교육연구』(도서출판 하우, 2010)

논문

최윤용, 「서당의 교육방법과 현대적 의의」(『한문고전연구』 17-1, 한국한문고전학회, 2008)
이항재, 「충남지역 서당교육에 관한 연구(I)」(『한국교육사학』 18, 한국교육사학회, 1996)
표영삼, 「접(接) · 포(包)조직과 남 · 북접의 실상」(『한국학논집』 25,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4)

웹페이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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