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조 묘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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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유물
8세기 중엽 당(唐) 유주부(幽州府)에서 사신으로 발해에 다녀온 장광조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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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8세기 중엽 당(唐) 유주부(幽州府)에서 사신으로 발해에 다녀온 장광조의 묘지.
개설

장광조는 8세기 중엽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주희채(朱希彩)의 막료(幕僚)로 활동하였다. 그의 묘지에는 사신이 되어 발해에 다녀온 사실이 나오는 데, 그 시기는 대력 3년(768)에서 7년(772) 사이로 추정된다.

내용

장광조 묘지는 1979년 4월에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줘현[涿縣] 타상촌[塔上村] 양러우향[楊樓鄕] 군부대에서 출토되었다. 묘지의 제작 시기는 776년이다. 묘지는 정방형의 개석(蓋石)과 지석(誌石)으로 이뤄져 있다. 개석의 크기는 한 변이 61㎝이고, 두께는 4㎝이다. 윗면에는 행서(行書)로 ‘당 고 전중감 장군 묘지(唐故殿中監張君墓誌)’가 새겨져 있다. 지석은 한 변이 61㎝이며, 두께는 6㎝이다. 묘지문의 글씨체는 대체로 행서(行書)이며, 일부에 당(唐)대에 쓰인 초서(草書)체인 금초(今草)가 섞여 있다. 글은 모두 23행, 687자이다.

장광조는 문헌기록에는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그는 범양인(范陽人)으로 서진(西晋)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사공(司空) 무선(茂先) 즉 장화(張華: 232~300)의 후예라고 한다. 증조부 장정(張政)과 조부 장인(張仁), 부친 장운(張惲)은 모두 유학으로 저명하였고, 본인 역시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스물 전후의 나이에 역주(易州) 만성현승(滿城縣丞) 사천학부(詞泉學府)의 관리직을 거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주희채(朱希彩: ?~772)의 막료(幕僚)가 된다. 지략과 언변이 뛰어나 발해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 공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시전중감(試殿中監) 상부공(尙膚公)을 받았다. 이후 절도유후압아(節度留後押牙)까지 올랐고, 대력(大曆) 11년(776)에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장광조가 발해에 사신으로 갔던 시기는 대체로 대력 3년(768)에서 7년(772) 사이로 추정된다. 그가 막료로 있었던 주희채는 768년에 절도사 이회선(李怀仙)을 죽이고 스스로 절도유후가 되었다가, 그해 11월에 중앙으로부터 절도사로 승인받았다. 그리고 772년에 부하에게 피살되었기 때문에, 장광조의 발해 파견을 그 사이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발해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의 치세 중반기에 해당한다.

참고문헌

『唐代墓 誌彙編續集』(周绍良, 上海古籍出版社, 2001)
「장광조묘지」(곽승훈 외, 『중국 소재 한국 고대 금석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장광조 묘지」(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한국고대금석문』 제3권,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7)
「唐入渤海使张光祚」(羅繼祖, 『史學集刊』 1983-2, 1983)
「唐代張光祚墓誌淺釋」(毆潭生·王大松, 『文物』 1981-3, 1981)
집필자
권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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