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전개발운동 ()

근대사
사건
1930년대 초반 조선인들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미명으로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
정의
1930년대 초반 조선인들을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미명으로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
개설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은 1930년대 세계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일본이 자국의 경제적 난국을 타개하고 때마침 만연하던 사회주의 사상으로부터 조선인을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전개한 정신 계몽운동이다. 경제적·사상적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인에게 마음의 밭을 잘 가꾸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을 심어줌으로써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1930년대 초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농촌경제가 위기를 맞게 되자 조선 쌀을 일본으로 들여가는 것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 정책은 조선 농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였다. 또한 일본 사회는 1920년대부터 확산되기 시작한 사회주의사상으로 사회 전체가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행되었다.

일제는 위험사상 방지책으로 신도·불교·기독교 등 종교계를 동원하기로 하였다. 특히 종교 가운데서도 불교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심전이란 용어는 불교 외에 유교에서도 사용되던 개념이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을 통해 마음을 잘 다스리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조선인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경과

1931년 7월 제6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케(宇垣一成)는 일본의 농촌경제갱생계획을 모방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이 물질적인 면에서의 갱생운동이었다고 한다면 심전개발운동은 정신 계몽운동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33년 말부터 심전개발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35년 총독부가 도지사회의(道知事會議)와 도참여관회의(道參與官會議) 등을 통하여 정신작흥·농산어촌진흥·자력갱생운동 강화에 관한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입안하였다.

심전개발운동은 193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학무국은 ‘국체관념(國體觀念)의 명징(明徵)’, ‘경신숭조(敬神崇祖) 사상 및 신앙심을 함양할 것’, ‘보은·감사·자립의 정신의 양성’이라는 이른바 심전개발 3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학무국 사회교육과에서는 심전개발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홍보 책자 3만부를 제작하여 관련 단체에 배포하였다. 나아가서 라디오 방송에 강좌를 마련하여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36년 1월 학무국 소속의 종교계를 종교과로 승격시켜서 심전개발운동을 활성화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교 단체·학교·사회단체 등에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라는 통첩을 발송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각 종교 단체로 하여금 전국 순회강연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순회강연에는 종교계 지도자들이 연사로 초빙되었고, 각 시군은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불교계는 총독부의 이러한 지침에 따라 교계의 명사들을 동원하여 전국 순회강연을 실시하였다. 당시 중앙불교전문학교 전임강사였던 권상로(權相老)와 김태흡(金泰洽) 그리고 본사 주지들 가운데 신망이 두터운 승려들을 강사로 동원하였다. 심전개발운동 순회강연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학생들과 일본 유학생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경찰서, 군청 등에서 마련한 간담회에 참석하여 심전개발운동 전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불교계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불교시보(佛敎時報)』는 기사를 통하여 심전개발운동의 선전지를 자처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심전개발운동이라는 관제운동을 마치 민간 차원의 운동인 것처럼 선전하고 진행시켰다. 심전개발운동은 1940년까지 지속되기는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시비상체제가 형성되면서 탄력성을 잃게 된다.

의의와 평가

심전개발운동은 조선인들로 하여금 당시 국제사회가 직면한 경제적·사상적 위기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었지만 그 내면에는 종교계를 동원하여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을 양성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는, 1930년대 초반에 시행된 농촌진흥운동과 심전개발운동으로 1935년 이후 농촌사회가 상대적인 안정기를 맞이하였다는 점에서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선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였다. 관제운동이었던 이 운동은 조선인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참고문헌

『施政三十年史』(朝鮮總督府, 1940)
「1930년대 후반 조선총독부의 ‘심전개발운동’ 전개와 조선 불교계」(김순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편, 국학자료원, 2000)
「1930년대 전반기 재조선(在朝鮮) 일본 불교계의 동향 -『조선불교』지에 나타난 활동을 중심으로-」(김순석,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12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1935∼37년 일제의 ‘심전개발’정책과 그 성격」(한긍희, 『한국사론』 35,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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