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30본사 주지연합사무소에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서 설립하였다.
중앙학림(中央學林)은 1906년에 불교계의 근대화를 지향하였던 불교연구회가 불교계의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한 명진학교(明進學校)로 처음 개교하였다. 1910년 불교사범학교로 개편하였으며, 1914년 불교고등강숙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15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각황사에서 개최된 30본산 주지회의원 정기총회에서 불교고등강숙의 명칭을 중앙학림으로 개칭하고, 11월 5일 당시 숭일동[지금의 명륜동 북묘(北廟)]로 이전, 개교하였다. 학생은 전국 30본사를 9등급으로 나누어 등지별로 인원수를 제한하였고, 정원은 120명이었다.
1922년 중앙학림은 불교계의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용운의 지도로 중앙학림 학생들은 불교계의 만세 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앙학림은 총독부로부터 전문학교 승격이 거부되고, 1922년 4월을 기점으로 5년간 휴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중앙불교전수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고,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됐다. 1940년 혜화(惠化)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1946년 동국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니 현재의 동국대학교이다.
중앙학림의 초대 학장은 30본산 연합사무소 위원장인 강대련(姜大蓮)이었고, 학감 김하산(金河山), 강사 백초월(白初月), 국어 교사 송헌석(宋憲奭), 산술 교사 이명칠(李明七), 기숙사 요감(寮監)은 오리산(吳梨山) 등이었다. 입학 조건은 전통 강원을 졸업한 강사 자격을 갖춘 승려들이었기 때문에 중앙학림을 졸업한 학생은 포교사로 인정하고 각처에 보내 포교 업무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 지식인 양성기관으로써 졸업생들은 불교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정책과 불교계의 상황 변화에 따라 여러 번 교명이 바뀌었지만 운영 주체는 불교계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제가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학림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에서 운영하였던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런 까닭에 1919년 불교계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고, 수많은 항일 승려를 배출하였다. 중앙학림의 맥은 현재까지 이어져 이후로도 많은 인재가 양성되고, 불교계의 걸출한 지도자들의 산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