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곡물협회연합회 ()

근대사
단체
1934년 조선 쌀에 대한 일본 이출 통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 내의 지주 및 미곡상들이 조직한 단체.
정의
1934년 조선 쌀에 대한 일본 이출 통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 내의 지주 및 미곡상들이 조직한 단체.
설립목적

1920년대 말부터 세계 대공황과 농업 공황의 여파로 쌀값 하락이 격심해지자 일본 정부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전체를 아울러 미곡 공급을 축소, 조절하면서 우선적으로 조선미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산미증식계획으로 미곡 증산을 강요하던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1933년 11월「미곡통제법」 제4조가 시행됨에 따라 조선미의 일본 이출이 제약을 받게 되었고, 이어 1934년 5월 「임시미곡이입조절법(臨時米穀移入調節法)」을 시행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미의 보호를 위해 조선미의 이출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조선미 이출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항구적인 미곡 자치 관리안을 마련하여 조선미의 일본 이출을 제약, 조절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의 일본인 및 조선인 지주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하여 이익 단체를 조직하여 대응하고자 했다.

연원 및 변천

조선 내 지주와 미곡상들은 이미 각 지역별로 곡물상조합, 곡물협회 등을 조직하여 미곡 유통에 대한 경쟁과 분쟁을 조정해왔다. 1934년 조선미 통제가 본격화되자 이러한 각 단체들을 연합하여 집단적인 대응을 하고자 1934년 9월 조선곡물협회연합회(朝鮮穀物協會聯合會)를 조직했다.

1934년 9월 18일 역원(役員)회의를 개최하여 회장·간사·감사 및 이사·고문 등의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연합회 회장에 아리가 미츠토요(有賀光豊) 조선식산은행 은행장이 선출되었다. 또한 미곡 통제안에 대한 방침을 협의하고, 1934년 10월 제1회 조선곡물협회연합회 미곡대회를 군산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제1회 미곡대회에서 회원인 조선 내 지주, 미곡상 대표들은 미곡 이출을 제약하는 곡물 검사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이후에도 연합회는 계속 총독부의 미곡 통제와 곡물[벼] 검사에 대한 개선책을 제기하였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을 방문해 조선미 통제 완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5년 제2회 미곡대회는 진남포에서 개최되었고, 1936년 제3회 미곡대회는 함흥에서 개최되었다. 1939년 이후 전시 식량 통제가 실시되면서 연합회는 해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곡물협회연합회는 조선의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 중심으로 1930년대 초반 세계 대공황과 농업 공황으로 인한 미가 하락, 미곡 유통 통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이익 단체로서 자신들의 미곡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의 피해를 줄이고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요구는 일본 정부의 미곡 정책에 일부 반영될 여지는 있었으나 미곡 통제 자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참고문헌

『매일신보(每日新報)』(1934.7.18; 1934.9.18; 1934.10.16; 1934.12.28; 1935.3.5)
『동아일보(東亞日報)』(1934.7.18; 1935.5.9; 1935.11.10; 1936.3.29; 1936.8.27; 1937.9.21)
『한국양정사(韓國糧政史)』(농수산부, 1978)
집필자
이송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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