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훈(洪錫勳)은 1921년 7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여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4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같은 해 2월 16일 중국 쉬저우〔徐州〕지구 치중대(輜重隊)에 배속되어 근무하던 중 7월 7일 장준하(張俊河) · 윤경빈(尹慶彬) · 김영록(金永錄) 등과 함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8월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10월 22일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임천(臨泉)에 있는 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분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韓國光復軍幹部訓練班, 약칭 한광반) 제1생으로 입교하여 훈련을 수료하였다.
1944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한광반을 수료한 43명과 함께 임천을 떠나 6천 리(2,356㎞) 장정(長征)의 고난을 극복하며, 1945년 1월 30일 신송식(申松植) 교관의 인도로 충칭〔重慶〕에 도착하여 대환영을 받았다. 이 사실은 충칭 내 각 신문사가 대서특필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극찬하였고, 중국의 조야 요인들도 한국 청년 일행을 환영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홍석훈은 중국중앙군사위원회(中國中央軍事委員會)의 9개 항 행동준승(行動準繩) 폐기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주성 회복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2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 서기로 임명되었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잠행중앙관제(暫行中央官制)에 따라 선전부원으로 임명되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政訓處) 부관으로 근무하면서 대적방송을 통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등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선전하였다. 6월에는 시안〔西安〕 산시성〔陝西省〕의 광복군 제2지대로 배속되어 한미 합작 특수훈련(OSS 훈련) 제2진으로 선발되어 훈련 과정을 모두 수료한 후 한국 후방의 특수공작 임무를 맡은 공작조(工作組)에 편성되어 한국 내 정진군(挺進軍)으로 출발하여 대기 중 8 · 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8일 중국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