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펑톈성 신빈현 홍동소학교에서 교원으로 지내며 민족교육에 힘썼다. 1919년 3 · 1운동 때 홍동소학교 학생들을 모아 시위를 준비하여 5월 1일 신빈현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펑톈성 유하현 삼원보에 있는 민족운동 기관인 경학사(耕學社)에 들어갔다.
이시열(李時說)의 권유로 한족회(韓族會)에 가담하여 기관지인 『 한족신보』 편집을 맡았다. 1920년 1월 삼원보 중국 경찰대에 인쇄기와 문서를 빼앗기고, 경신참변으로 편집원 방기전이 희생됨으로써 『한족신보』의 발행이 중지되었다.
1920년 5월 한족회의 이시열 · 현익철 · 현정경, 국내의 김관성 · 이춘산 등과 함께 관전현 향로구에서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간의위원(幹議委員)을 맡았다. 1920년 가을 박의준 등과 평안남북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한인 관공리를 처단하려 하였다. 1921년 3월 일제에 발각되어 광한단원 8명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928년 1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흥경현 왕청문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단체 정의부가 설립한 화흥중학교에서 교원 생활을 하였다. 화흥중학교 학생들은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여기서 역사와 음악 담당 주임교사로 근무하였다.
1929년 11월 화흥중학교에서 현정경 · 현익철 · 이동림 등의 발기로 조선혁명당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8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펑톈에서 한‧중 연대를 추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자, 중앙집행위원장에 올라 당원들의 통합과 중국과의 연대 투쟁에 힘썼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조선혁명당 본부를 흥경현 신빈진으로 옮기고 한‧중 연대를 강화하려 하였다. 중국 민중의 반일 정서를 높이고자 격문 · 전단 등을 인쇄하여 각지에 뿌리고, 일본군과의 무장투쟁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12월 일본의 위임을 받은 동변도진수사 우지산이 대한 국민부(大韓國民府)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조선혁명군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조선혁명당과 대한국민부의 간부 30여 명과 함께 당면 정세와 항일투쟁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 5월에 출소하여 통화현 자택으로 돌아가 관동군의 감시를 받았다. 이때 거듭 회유를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그 때문에 1945년 8월 통화경무소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8‧15광복 후에 석방되었다.
8 · 15광복 후 이시열‧이연‧김진호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였다. 1946년 국공내전 발발로 만주가 혼란에 빠지자 조선혁명당의 신국가 건설운동은 무산되었다. 이후 중국 둥산성〔東三省〕 내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 및 귀국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교연합회의 문화부장, 조선혁명동지회 주석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6년 지린성〔吉林省〕 연길시 조선족중학교 교장, 1948년 도문중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1951년부터 중국 둥베이 지방 지린성의 연변대학(延邊大學] 조문과(조선언어 · 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19551965년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을 지냈다. 19631964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지린성위원회 상무위원 겸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기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한글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연길시 제2중학교 교장 재직 중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 기념대회’를 열고 한글연구회 결성을 결의하였으며, 연변조선어문연구회 준비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문화대혁명 때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연길에서 사망하였다.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