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재는 1921년 6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밀파된 안내원을 따라 7월에 온 가족이 인천항에서 어선을 타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회장 김마리아와 함께 상하이행을 결행하였다. 이들은 인천을 탈출하여 약 1개월 만인 8월 초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김구(金九) · 조완구(趙琬九) · 윤기섭(尹琦燮) · 엄항섭(嚴恒燮) · 이시영(李始榮) · 차리석(車利錫) · 김붕준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 단체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이 충칭〔重慶〕 시절(1940~1945)에 작성해 놓은 연도 미상의 당원 명부에 지청천(池靑天, 일명 이청천) · 이광(李光) · 이시영 · 이복원(李復源) · 이달수(李達洙) 등 173명과 함께 당원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남편 김붕준은 1934년 6월에 작성된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에 등재되어 있었다.
1935년 11월 항저우〔杭州〕에서 설립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김구 · 이동녕(李東寧) · 송병조(宋秉祚) · 조완구 · 차리석 · 안공근(安恭根) · 엄항섭 · 이시영 등이 설립한 민족주의 계열 정당이었다.
1941년 6월 충칭에서 노영재는 이헌경 · 정정화 · 이국영 · 김효숙 · 방순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에 참여하였다. 1943년 3월경 잘못을 범한 당원에 대한 처벌 방침에 따라 김경직(金經稷) · 강홍주(姜弘周) · 김복오(金福五) · 김신두(金信斗)와 함께 한국독립당 당적에서 제명되었다.
1944년 3월 김원봉(金元鳳)이 주도한 좌익계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최석순(崔錫淳) · 김순애(金淳愛, 김규식의 부인) 등 24명과 함께 감찰위원을 맡았다.
1932년 이후부터 1945년 8 · 15광복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8 · 15광복 후 귀국하여 지내다가 한국전쟁으로 남편 김붕준이 납북되었다가 유엔군의 공습에 휘말려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노영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