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구(崔允龜)는 1885년 8월 23일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 지촌리(芝村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참여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대한통의부는 서간도 지역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 한족회(韓族會)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이 연합하여 1922년 1월 결성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1922년 8월 확대 개편된 독립군 조직이다.
1929년 5월 지린성〔吉林省〕 지린시〔吉林市〕 우마행호동(牛馬行胡洞) 거리의 국민부(國民府) 사무소에서 독립군 지도자들이 모여 남만주 일대의 유일혁명군 정부인 국민부의 정규군으로 활동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결성할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조선혁명군은 교민 보호와 친일파 숙청, 국내 진입 작전 전개와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헌 및 악덕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삼았던 무장 독립군 부대이다.
1932년 3월 조선혁명군 중대장으로서 총사령(總司令) 양세봉(梁世奉), 참모장 김학규(金學圭) 등과 함께 봉천성(奉天省) 신빈현(新賓縣)에서 만주국 군경과 접전을 치른 뒤 영릉가(永陵街)를 점령하고, 이어 벌어진 흥경현성전투(興京縣城戰鬪)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일제를 물리쳤다. 1933년 1월 일제가 건설한 심해선(瀋海線) 철도 파괴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4년 9월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순국하고 김활석(金活石)이 신임 총사령에 올랐다. 김활석은 1935년 1월부터 일본군과 만주군의 총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조직한 무장 부대인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연대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에 최윤구는 1935년 10월 조선혁명군 제2사(師) 제1연대장, 1936년 1월 조선혁명군 제2사 사령(司令) 등을 지내면서 동북인민혁명군과 연대하여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37년 4월 일본군의 조선혁명군에 대한 탄압 작전을 피하기 위해 박대호(朴大浩) 등과 함께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로군에 참가하여 대일 항전을 계속해 나갔다. 동북항일연군은 1936년 3월 중국공산당이 만주 지역에서 항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 개편하여 조직한 무장 부대였다.
1938년 이후에도 동북항일연군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 제1군 경위연대 산하 교도대대에 속해 있다가 7월경 경위연대가 경위여단으로 확충될 때 갈라져 나와 제1군 교도대대 대대장 겸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2월 15일 최주봉 증 귀순자들이 인솔한 일 · 만(日滿) 연합 토벌대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를 추적할 때 최윤구는 교도대대를 이끌고 양정우를 엄호하다가 전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