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국권피탈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종 황제 측근인 재종형 현상건(玄尙健) 집에 기거하면서 영어전수학교를 다녔다. 그 뒤 상하이 주재 미국인 회사에 재직하면서 한인들의 미국행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기선회사 및 여권 당국과 교섭하는 일을 맡았다.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경 한인공산당(韓人共産黨)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초 이동휘(李東輝) 등의 정부 쇄신안이 거부되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신당을 창립할 때 동참하였다. 이후 상하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이 조직되자 기관지 『화요보(火曜報)』 주필을 맡아 공산주의 사상의 선전과 보급에 힘썼다.
1922년 2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 통합을 촉구하는 비밀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을 때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렸을 때 왕삼덕(王三德)과 함께 고려공산당 대표로 참여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외교분과위원에 선임되었다. 이때 창조파가 조선공화국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 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고 국무위원제를 실시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23년 8월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이 평안도 지방의 대홍수로 발생한 이재민을 구호하고자 내지동포수재구제회를 조직하여 수재의연금을 전달할 때 기여하였다. 1925년 9월 상해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6월 김규식(金奎植) · 여운형(呂運亨) · 김두봉(金枓奉) · 최창식(崔昌植) 등과 함께 중국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예비강습소를 개설하였다. 이때 김규식 · 여운형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다. 그 후 예비강습소가 상해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자 여운형 · 김종상(金鍾商)과 함께 전임교사로 활동하였다.
1924년 11월 상하이에서 윤자영(尹滋瑛)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1925년 4월 청년동맹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신설된 조사부의 위원을 맡았다. 이때 잡지 발간, 강연회 개최, 인쇄물의 국내 밀송 등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6년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인 청년들의 중국 대학 및 군관학교 입학 주선과 자격 심사를 주관하였다. 1927년 4월 독립 단체의 대통합을 촉구하기 위한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고, 10월에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상하이에서 의열단(義烈團) 창립 제9주년을 맞이하여 한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1928년 봄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경찰이 프랑스 조계(租界) 당국의 협조하에 수색을 진행할 때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1932년 6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2월 옥고 여파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