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묵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김해산(金海山), 김규환(金奎煥), 김국빈(金國賓)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 12월 9일
사망 연도
1944년 4월 19일
본관
선산(善山)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
대표 상훈
대통령 표창(1963)|건국훈장 애국장(1991)
내용 요약

김정묵은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대 베이징 일대에서 한인 민족운동과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 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북(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3년 네이멍구 따뚱‧바오터우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김정묵(金正默)은 1888년 12월 9일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생으로,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김정묵은 1918년 가족과 함께 북만주 펑텐〔奉天〕(지금의 주1〔瀋陽〕)으로 망명하여 베이징・상하이〔上海〕・펑텐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과 중국 주2의 군벌 주3〔張學良〕 휘하에서 고위 장교인 군법처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광복회, 국민대표회의 베이징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 북경한교구락부(北京韓僑俱樂部), 북경한교동지회,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한인애국단, 의열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장인의 동문 이승희(李承熙)가 있는 중국 주4〔東北〕의 미산〔密山〕 한흥동(韓興洞)에 가서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종사하였다. 1914년 이승희가 공교회(孔敎會) 운동을 위해 베이징으로 가자 베이징에 유학하였다. 1914년 베이징의 법정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4년간 근대 학문을 수학하였다.

1918년 제1차 주5의 종전에 즈음하여, 중국 둥베이(만주)와 러시아 주6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였다. 김정묵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여러 정책을 결정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임시정부 비판과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 한인 교민 단합을 통한 독립운동의 진흥을 꾀하였다.

1925~1926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김창숙(金昌淑)의 ‘제2차 유림단의거’를 지원하였고, 1926년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11월경 베이징에서 입적간민회(入籍墾民會)를 결성하고 만주 지역 한인의 중국 입적을 돕고,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과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東三省〕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베이 지방(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1년 일본의 중국 둥베이 지방 침략 사태인 주7(滿洲事變, 9 · 18사변)’ 이후 중국 동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1932~1933년경 김원봉(金元鳳)과 항일구국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주8〔熱河, 지금의 청더〕 지방에 중 · 한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한인의용군 사령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1932년 8월 이후 중국군사위원회 북평분회(北平分會, 약칭 군분회) 법무관 직위를 이용하여, 중국 국민당의 간부 및 군사위원들과 접촉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뤄양군관학교의 개설과 학생 모집, 운영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의열단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는데, 1932년 6~7월경 김원봉 · 김규식 등이 중국인들의 항일 조직인 ‘북경구국항일회’와 제휴, 조직하여 한때 존속한 ‘중한항일의용군’의 지대 사령관을 맡기도 하였다. 즉, 의열단은 김원봉과 유기석‧김강암‧김세웅 등을 ‘동북구국항일회’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이 구국회는 베이징 부근의 러허성〔熱河省〕을 동북민중항일구국군 독립 제1지대 주둔구로 확정하고, 김정묵에게 지대 사령관 직책을 위임하였다.

중한항일의용군 산하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지청천(池靑天, 이청천)의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 부대가 명의상으로 편제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북경항일구국회에서 독립지대 사령으로 임명된 김정묵을 러허 지방으로 파견하여 러허와 3∼4세기 중엽 만주의 랴오시〔遼西〕 지방의 중국구국군과 합작하여 활동하게 하는 한편, 이 지역의 한교의용군(韓僑義勇軍)을 제3총대로 편성하여 기존 동북의용군의 전력을 보강, 항일 전쟁을 수행한다는 원대한 계획이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 측의 일부 협조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김정묵은 1932년 중국군사위원회 북평분회의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북평분회는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국민당 정부 수반이었던 주9〔蔣介石〕의 무저항 정책으로 사실상 만주를 일본 관동군에 내준 뒤 베이징으로 옮겨 온 장쉐량을 위해 1932년 8월 임시로 설치한 조직이었다. 장쉐량은 군사위원회 북평분회의 대리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정묵은 1930년대 초 베이징 지역 일대의 중국 국민당 정부 및 군사위원회 요인들과 연계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위상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베이징과 중국 주10〔華北〕 지방 일대에서 만주사변 이후 대거 남하한 한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중국 둥베이 및 국내, 그리고 중국 관내(關內) 요인들과 긴밀히 협력하였다. 특히, 의열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하던 중국 남부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한‧중 합작의 모색이나 펑위샹〔馮玉祥〕 등 중국 군벌 세력의 지원을 얻기 위해 분투하였다.

또 유기석(柳基錫)‧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1933년 6월경 중국 북쪽의 주11〔內蒙〕 지방 주12〔包頭〕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趙潤植, 전 장쉐량의 동북군 제3지대 사령관)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成仁鎬)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 조직을 결의하고, 중한호조회 주13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조윤식과 유기석은 중국 주14 정부의 원조를 받기 위해 중국인 대표 2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당시 북평(현재 베이징)군사위원회 분회 위원장인 하응흠(何應欽)의 대리인을 만나 중한호조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김정묵 등의 한 · 중 연대를 통한 항일 활동 전개는 무산되고 말았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환·장세윤 외, 『해산 김정묵과 가문의 독립운동』(선인, 2021)
류시중·박병원·김희곤 역주, 『국역 고등경찰요사』(도서출판 선인, 2010)
『독립유공자 공훈록』 5(국가보훈처, 1988)
『독립운동사』 4(국가보훈처, 19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9(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2(東京: 原書房, 1967)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조선총독부 경무국, 1934)

논문

권대웅,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의 사회적 연망과 해외 망명」(『민족문화논총』 74,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20)
김영범, 「民山 金敎三의 민족운동과 광복 후 정치활동 - ‘父子·夫婦·丈壻 독립운동가’였음에 주목하며」(『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5,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조규태, 「海山 金正黙의 중국 關內에서의 민족운동」(『대구사학』 138, 대구사학회, 2020)

신문

『신한민보』(1933. 4. 6.)
『신한민보』(1933. 3. 30.)
『동아일보』(1930. 2. 26.)
『동아일보』(1922. 12. 26.)
『독립신문』(1921. 12. 26.)
주석
주1

중국 만주 랴오닝성에 있는 도시. 교통의 요지이며 중공업이 발달하였다. 성내에는 궁전이 있고, 교외에 동릉(東陵)ㆍ북릉(北陵) 따위의 청나라 명소가 있다. 1932년 일본에 의하여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펑톈(奉天)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0년에 다시 선양으로 바뀌었다. 랴오닝성의 성도(省都)이다.    우리말샘

주2

중국 국민당이 1925년 광저우(廣州)에 수립한 중화민국 정부. 쑨원(孫文)이 죽은 후 후한민(胡漢民)이 광둥 정부(廣東政府)를 개혁하여 고친 이름으로, 후에 장제스(蔣介石)의 지도 아래 민주 공화국으로 발족하였으나, 중국 공산당에 패하여 1949년 대만으로 물러났다.    우리말샘

주3

중국 군인이자 정치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장제스를 구금하는 시안사변을 일으켰다. 공산당과 내전을 종식하고 일본과 싸우기를 요구했고 이것으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바로가기

주4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黑龍江省)ㆍ지린성(吉林省)ㆍ랴오닝성(遼寧省)의 세 성으로 이루어지는 지역. 북부는 농업, 남부는 중공업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에서 철도망이 가장 조밀하다. 1932년부터 1947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일본이 건설한 공업 시설을 바탕으로 그 후 중국 최대의 중화학 공업 기지가 되었다.    우리말샘

주5

1914년부터 4년간 계속되었던 세계 전쟁.    바로가기

주6

러시아의 동남쪽 끝에 있는 지방. 우리나라 동해에 접하여 있으며 두만강을 사이로 우리나라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아연ㆍ석탄 따위의 지하자원이 많고 나무를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하였다. 중심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이다. 면적은 16만 5900㎢.    우리말샘

주7

1931년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계기로 시작한 일본군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대한 침략 전쟁.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은 둥베이 삼성(三省)을 점령하고 이듬해 내몽골의 러허성(熱河省) 지역을 포함하는 만주국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은 그 뒤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우리말샘

주8

‘청더’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9

중국의 군인ㆍ정치가ㆍ중화민국의 총통(1887~1975). 이름은 중정(中正). 쑨원(孫文)에게 배웠으며,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北伐)에 성공하고 난징(南京)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항일전에 힘썼으며, 헌정(憲政)하의 초대 총통에 취임하였으나 중공과의 전투에 패하여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우리말샘

주10

중국의 북부 지방. 베이징과 허베이성(河北省), 산시성(山西省), 톈진(天津),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등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말샘

주11

중국 북부, 몽골고원 동부를 차지하는 자치구. 사막도 있지만 대부분이 초원으로 농업, 목축업이 중심을 이룬다. 임산 자원이 풍부하며, 금ㆍ철ㆍ석탄ㆍ소금 따위가 난다. 구도(區都)는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면적은 118만 3000㎢.    우리말샘

주12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중부, 황허강의 활 모양으로 굽은 지역의 북쪽에 있는 중공업 도시. 화북 지구와 서북 지구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우리말샘

주13

어떤 일을 하기 위하여 미리 계획하고 준비함.    우리말샘

주14

1919년에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정강(政綱)으로 하여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화민국의 정당. 1926년부터 장제스(蔣介石)가 북벌을 실행하여 1927년 난징(南京)에 국민 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제이 차 세계 대전 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하여 1949년에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중국 국민 정부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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