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빈은 일제강점기 1919년 3·1운동 당시 고향인 평안북도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에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에 임명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중국 둥베이 지방(만주)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이때 동지 두 명과 함께 강을 건너다가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김홍빈(金洪斌)은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만주)으로 건너가 각지를 전전하였다.
1919년 3월 3 · 1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것을 목격하고, 고향인 창성군 읍내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간부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다. 4월 1일 창성 읍내 서문 밖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뒤, 경찰의 검거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 둥베이 지방으로 망명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을 맡은 안창호(安昌浩)가 1919년 5월 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안창호는 7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 연통제’를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연통제 업무가 개시되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와 국내외 연계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활성화하자는 의도로 조직되었다.
김홍빈은 1919년 11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조직에 참가하였다. 이후 연통부의 평안북도 창성군 장서(掌書)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명령과 공문 전달, 구국재정단원(救國財政團員)의 모집,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통신 연락 임무와 독립운동 고취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921년 7월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자금 모집과 선전 활동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고 같은 장서 직책을 맡은 신용철(申容澈) · 7 등과 함께 국내로 밀파되었다. 국내 잠입 후 무사히 임무를 마친 김홍빈은 9월 13일(음력 8월 12일) 동지들과 함께 중국 둥베이 지방을 거쳐 상하이로 귀환하던 도중, 압록강 변에서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 압록강을 건너다가 불행하게도 익사, 순국하고 말았다.
1921년 9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운동과 안타까운 충혼을 기리기 위해 추도식을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때 신우현(申禹鉉)과 백기준(白基俊)의 추도시가 낭송되었다. 신우현은 “복수하려는 의로운 기운이 연달아 일어났고〔雪恥義氣連〕 복수의 칼날을 연마한 지 십여 년〔磨劍十來年〕, 독립의 큰 기세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大局猶未了〕 의로운 혼을 압록강 변에 바쳤네〔魂寄鴨江邊〕”라고 만사(輓詞)를 지어 바쳐 김홍빈의 충절을 기렸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