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각(朴容珏)은 1898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철원 출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인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의 4촌 아우이다. 서울청년학원을 중퇴하였다.
박용각은 1919년 3월 10일 철원읍 3 · 1운동에 참여한 뒤 경찰의 추격을 피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에는 이승만(李承晩)의 대미(對美) 위임통치 청원에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하였다.
박용만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선을 달리하였다. 1925년 상하이에서 조직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의 후보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5년에는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무장투쟁 조직 의열단에 가입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의열단의 방침에 따라 중국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한인 간부훈련단에서 훈련을 마치고 조직적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중국의 국공합작(國共合作)이 결렬된 이후 중국 국민당의 좌익 탄압이 심해지자 의열단은 근거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하는 등 정치교육 운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일본이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만주)을 침략한 뒤 베이징이 위험해지자 의열단은 다시 난징〔南京〕으로 중심 활동지를 옮겼다. 이후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군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우고, 1935년까지 의열단 계통의 청년 항일 투사를 양성하며 중국 관내 지역 무장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았다.
이러한 의열단의 추세에 부응하여 박용각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의용대에도 관여하였고, 1940년 김원봉과 함께 충칭〔重慶〕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1945년 말 귀국할 때까지 중국 관내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