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철(朴容喆)은 1904년 강원도 철원읍 중리에서 태어나 철원농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철원농업학교 재학 중 철원 읍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경고문과 호소문 등을 배포하고 군청 앞 등지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철원읍 3 · 1운동은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 기독교인과 지역 청년 등 두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학생 시위는 철원농업학교의 박용철과 이해종(李海鍾), 철원보통학교의 임응렴(林應簾) · 이규정(李圭貞) 등이 주도하였다. 3월 10일 철원 읍내 북간산(北看山)에 모인 200여 명의 학생은 옥양목으로 미리 만들어 둔 태극기를 들고 철원군청 앞에서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때 박용철 등 학생들은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 1919년 9월 말 경성지방법원에서 풀려났다.
1922년 4월 어린 나이에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상해청년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11월에는 청년동맹회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3월 말 상하이 삼일당(三一堂)에서 한인청년회가 창립되자 감사위원에 선출되어 청년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1년 12월 24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2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염온동(廉溫東) · 염석락(廉錫輅)과 함께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뽑혀 임시정부의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임시정부가 옮겨간 항저우〔杭州〕에서 재건된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였는데, 사실상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與黨)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이 독립운동 정당의 기관지 『 진광(震光)』의 발행에도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