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수(柳興洙)는 1921년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雲山面) 고산리(古山里)에서 아버지 유석규(柳錫圭)와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 사이에서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1937년 서산면의 여미(余美)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심상과(尋常科)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9년 7월 왜관철교(倭館鐵橋) 복선화 작업에 학생들이 동원되는 과정에서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발생한 이른바 왜관사건(倭館事件)을 계기로 결성된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백의단은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관한 서적과 잡지 등을 읽고 토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일제의 패망을 전망하며,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였다.
1939년 11월에는 박효준(朴孝濬) · 강두안(姜斗安) · 이태길(李泰吉) · 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하고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담은 원고를 모아 작품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1940년 1월 문예지 『반딧불』을 발간하였다.
1940년 11월에는 비밀결사인 문예부를 조직하고 활동에 참가하였는데, 학교 당국과 일제 경찰의 감시와 통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문예 활동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향후 독립운동의 전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41년 2월에는 유흥수의 하숙집에서 권쾌복(權快福) · 배학보((裵鶴甫) · 조강제(趙崗濟) · 최영백(崔榮百) · 문홍의 등과 함께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고 이에 참여하였다. 당은 산하에 총무부 · 학술부 · 문예부 · 연구부 · 경기부 등의 부서를 두고 각 분야에서 학생들의 독립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때가 오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당의 명칭인 다혁당은 영웅은 다색(茶色)을 좋아하며, 혁(革)은 혁명을 의미한다는 취지에서 붙여진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당(黨)이 결성된 것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를 통합하여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훈도(訓導)로 활동하던 정현(鄭鉉)이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가르쳤던 것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에 의해 그의 집이 수색당하던 중, 윤독회(輪讀會)가 발간한 잡지 『반딧불』이 발견되고 당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면서 사건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까지 학부형 · 교사 등을 포함해 300여 명의 관련자가 검거되었으며, 이 가운데 34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약 30여 명의 학생이 징역 5년에서 2년 6월의 형량을 선고받았으며, 박재민 · 강두안 · 박찬웅 · 정세파 · 서진구 등은 고문 후유증과 극심한 영양실조로 옥사하였다. 유흥수는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 · 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회 사무총장과 독립기념관 이사를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