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승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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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敦化市) 강남진(江南鎭) 융성촌[永勝村]에 있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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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敦化市) 강남진(江南鎭) 융성촌[永勝村]에 있는 남북국시대 발해의 집터.
내용

영승유적은 융성촌의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목단강에 인접한 충적평원에 위치한다. 유적의 서쪽은 목단강과 접해 있고, 동쪽은 얕은 산들과 접해 있다. 유적의 서쪽 약 5㎞ 떨어진 곳에는 발해의 동모산으로 알려져 있는 성산자산성이 있고, 동쪽 약 3~4㎞ 떨어진 곳에는 발해 왕실귀족 고분군인 육정산고분군이 있다. 영승유적은 주변 자연 환경 조건이 좋고, 중요한 발해 유적들의 중심에 위치하여, 발해 초기의 유적지로 인식되었다.

영승유적은 둔화시에 있는 발해 유적지 중 가장 큰 규모로, 남북 길이가 1,000여m, 동서 너비가 700여m, 전체 둘레는 3,400여m이다. 이 유적은 1974년에 발견되어 1983년의 중국 전국 문물 조사 때에 조사가 이뤄졌고, 이후 여러 차례 지표조사가 있었다. 유적에서는 5곳의 건축지가 확인되었다. 제1호 건축지는 지표보다 높은 토대 위에 있고, 건축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주변에는 베무늬 흔적이 남아 있는 암키와, 수키와, 와당, 방형 벽돌, 긴 벽돌, 치미 등이 흩어져 있었다. 제2호 건축지는 제1호 건축지에서 동북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고 비교적 규모가 작다. 제3호 건축지는 제2호의 남쪽 방향에 위치해 있고, 제1호 건축지와는 동서쪽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유적 내에서 발견되는 암키와, 긴 벽돌, 방형 벽돌 등의 건축 장식은 진흙으로 구웠으며 대부분 회색빛을 띤다.

제1호 건축지에서는 지름 14㎝, 두께 2㎝ 크기의 도깨비 문양 와당 잔편이 수습되었는데, 이런 와당은 육정산고분군 제1묘구에서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바 있다. 출토 토기 잔편들도 대부분 회색이고 진흙으로 빚었다. 대체로 무늬가 없으며, 소량의 홍색 토기도 있다. 당대의 개원통보(開元通寶)와 송대의 숭녕중보(崇寧重寶) 등의 동전이 수습되기도 했다. 영승유적은 1999년에 지린성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영승유적 북쪽 10㎞ 거리의 오동성이 발해의 초기 수도인 구국(舊國) 자리로 알려졌다. 1974년 유적의 발굴 이후에는 영승유적이 구국 자리라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많은 지지를 받았다. 영승유적을 구국 자리로 주장하는 근거는 오동성에 비해 약 3배가 커서 도읍지로 접합하다는 것과 성산자산성과 가까워 서로 호응하기 유리하다는 것, 발해 왕실 고분군인 육정산고분군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승유적에서 발견되는 동전을 제외한 유물은 모두 발해 유물의 특징을 가지는데, 오동성은 성의 구조와 시설 및 유물의 특징이 발해보다는 요금대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런데 2002년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길림대학변강고고연구중심이 실시한 제1호 건축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로 인해 영승유적의 성격이 논란이 되고 있다. 제1호 건축지는 토축의 기대 위에 2개의 방지(房址)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기대의 동서 너비는 43.7m, 남북의 길이는 약 21m이다. 남은 높이는 10~20㎝이며, 남면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과 서면의 남쪽편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호 방지는 기대의 서북부에 있고, 방지의 둘레에는 주춧돌이 둘러져 있다. 방지의 평면은 방형에 가깝고, 둘레 길이는 10.5~11m 정도이다. 2호 방지는 기대의 북부 중앙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1호 방지와 3m 떨어져 있다. 1, 2호 모두 온돌 시설이 있다. 유물로는 판와, 통와, 귀면와당 등의 건축재료와 도자기, 철기, 동기, 동전, 골각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동전의 대부분은 북송시기의 것이고, 정륭통보(正隆通寶), 대정통보(大定通寶) 등은 금대의 것이다.

2002년의 발굴로 중국에서는 영승유적을 대규모의 금대 취락지로 보고, 발해 초기의 도성유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영승유적은 과거에도 성벽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 발해 구국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영승유적이 구국 성지가 아닐 수는 있으나, 발해 유적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아직 유보해야 된다. 2002년의 발굴은 영승유적 전체에 대한 전면 발굴이 아니었고, 앞서 영승유적에서 발견되었던 발해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유물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승유적은 발해의 취락지로 요금대에 계속해서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참고문헌

『발해 유적 사전』(구난희‧이병건‧정석배‧백종오‧김진광‧전현실‧김진한,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중국경내 발해유적 연구』(방학봉, 백산자료원, 1999)
「吉林敦化市永胜金代遗址一號建築基址」(吉林大學邊疆考古研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考古』 2007-2, 2007)
「吉林敦化敖東 城與永勝遺址的發掘收獲」(吉林大學邊疆考古研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邊疆考古研究』 2003-2, 2003)
집필자
권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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