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사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신여성.
이칭
본명
김란사(金蘭史)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72년(추정)
사망 연도
1919년 4월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평양 혹은 안주(安州)
주요 경력
이화학당 총교사 및 대학과 교수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1995년)
내용 요약

하란사는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신여성이다. 본명은 김란사(金蘭史)이며 이화학당 입학 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였다.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이화학당에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 중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북경에서 별세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여성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신여성.
가계 및 인적 사항

하란사는 1872년(고종 9)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생이라고 주1. 1893년(고종 30) 하상기와 결혼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으며,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미국 입국 시 남편의 성을 따라 ‘란사 하(Nansa Ha)’로 기록한 이후 하란사(河蘭史)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본래의 성을 따라 김란사(金蘭史)로 기록하는 주2.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던 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 혈족이 없었다.

주요활동

하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1895년(고종 32)경으로 추정된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일본에서 1년 정도 수학한 후 1897년(광무 1) 다시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1900년(광무 4)부터 미국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서 수학한 후 1906년(광무 10)에 문학 학사(B.L.)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녀가 귀국한 후인 1906년 여름부터 이화학당 총교사(교감) 겸 기숙사 사감을 맡았으며, 1910년 대학과가 개설된 뒤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화학당의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학생들에게 주7을 일깨우고 주8로서의 삶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에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문회의 학생 유관순(柳寬順)도 있었다.

하란사는 귀국 후 고종의 통역과 고종과 엄비(嚴妃)의 자문(諮問)을 하며 왕실에 근대 학교의 설립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1909년(순종 3)에는 해외 유학을 다녀온 3명의 여성인 박에스더(김점동), 윤정원과 함께 고종으로부터 은장(銀章)을 수여받았다. 1910년대에도 국내에서의 선교 주9과 함께 여성 계몽과 교육을 위해 주10으로 노력하였다. 1916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주11을 통해 모금 활동에도 힘썼다.

하란사는 다른 주12들과 함께 을사조약(乙巳條約)과 일제의 강제 병합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파리 강화 주13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고종의 주14로 중단되었으며, 1919년 재차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하여 준비하던 중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하였다. 하란사는 여성 인권 신장과 교육에 헌신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이후 여성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상훈과 추모

국가 주15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주4했으며, 2018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의 위패주5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충량, 『이화80년사』(이대출판부, 1967)

논문

고혜령, 「최초 여학사 하란사의 생애와 활동」(『유관순 연구』 16, 백석대학교 유관순연구소, 2011)
김성은, 「신여성 하란사의 해외 유학과 사회 활동」(『사총』 77,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2)

인터넷 자료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2)
유관순 열사의 스승 김란사의 생애와 업적, 『중앙매일』(2016. 3. 3)(http://www.jamill.kr/news/articleView.html?idxno=55442)
주석
주1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따랐다. 『이화80년사』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의 졸업증명서에는 1875년으로 되어 있으며, 출생지도 평양이라는 설이 있다.

주2

기독교 세례명으로 추정되며 이전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주4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주5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 우리말샘

주7

자기 민족의 존엄과 권리를 지키고 민족의 단결과 발전을 꾀하려는 집단적 의지나 감정. 우리말샘

주8

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 우리말샘

주9

종교의 이념을 선전하여 널리 퍼뜨리기 위한 활동. 우리말샘

주10

여러 방면. 우리말샘

주11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하는 강연. 우리말샘

주12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 가지 민족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 우리말샘

주13

1919년에 제일 차 세계 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3국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을, 불가리아와 뇌이 조약을, 헝가리와 트리아농 조약을, 튀르키예와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였다. 우리말샘

주14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15

국가 유공자 및 그 유족에 대한 보훈, 제대 군인의 보상ㆍ보호 및 보훈 선양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중앙 행정 기관. 2023년 6월에 국가 보훈부로 승격되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홍나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