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란사는 1872년(고종 9)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생이라고 한다. 1893년(고종 30) 하상기와 결혼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였으며,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미국 입국 시 남편의 성을 따라 ‘란사 하(Nansa Ha)’로 기록한 이후 하란사(河蘭史)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본래의 성을 따라 김란사(金蘭史)로 기록하는 추세이다.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던 딸이 18세에 사망해 남은 직계 혈족이 없었다.
하란사가 이화학당에 입학한 시기는 1895년(고종 32)경으로 추정된다.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일본에서 1년 정도 수학한 후 1897년(광무 1) 다시 미국에서 유학하였다. 1900년(광무 4)부터 미국 오하이오웨슬리언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에서 수학한 후 1906년(광무 10)에 문학 학사(B.L.)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녀가 귀국한 후인 1906년 여름부터 이화학당 총교사(교감) 겸 기숙사 사감을 맡았으며, 1910년 대학과가 개설된 뒤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교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이화학당의 학생 동아리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선각자로서의 삶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 중에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문회의 학생 유관순(柳寬順)도 있었다.
하란사는 귀국 후 고종의 통역과 고종과 엄비(嚴妃)의 자문(諮問)을 하며 왕실에 근대 학교의 설립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1909년(순종 3)에는 해외 유학을 다녀온 3명의 여성인 박에스더(김점동), 윤정원과 함께 고종으로부터 은장(銀章)을 수여받았다. 1910년대에도 국내에서의 선교 활동과 함께 여성 계몽과 교육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16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순회강연을 통해 모금 활동에도 힘썼다.
하란사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을사조약(乙巳條約)과 일제의 강제 병합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고종의 승하로 중단되었으며, 1919년 재차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경에 도착하여 준비하던 중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사망하였다. 하란사는 여성 인권 신장과 교육에 헌신한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이후 여성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