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순은 한국인 여성 최초의 농학 박사이자 과학자이다. 190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식물학과를 졸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966년 규슈대학에서 57세의 나이로 한국 여성 최초로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8년 서울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의 초대 교수로 부임하고, 느타리버섯의 국내 인공 재배에 성공하였다. 1972년에는 한국균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서 한국 균학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김삼순(金三純)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에서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 김재희(金在曦)와 어머니 오연의(吳緣宜) 사이의 7남매 중 넷째이자 3녀로 태어났다. 남자 형제인 김홍용(金洪鏞), 김문용(金汶鏞), 김성용(金星鏞)은 우리 헌정 사상 유일한 3형제 국회의원이다. 여동생인 김사순(金四純)은 화학자 이태규(李泰圭)의 동생 이홍규(李弘圭)와 결혼하였고, 국무총리를 역임한 법조인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李會昌)의 모친이다. 김삼순의 남편 역시 제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강세형(姜世馨)이며 둘 사이 자녀는 없다.
김삼순은 192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8년 일본에 있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여자대학) 이과에 입학하였다. 이과를 택한 이유는 경성에 처음 왔을 때 전깃불과 전차(電車)를 보고 매료되어 앞으로는 과학이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는 진명여고보와 경성여고보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1938년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의지로 돌연 사직을 하고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간 김삼순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에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하고, 1941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이학부 식물학과에 입학하였다. 식물학과에서 사카무라 테츠〔坂村撤〕를 지도 교수로 하여 식물 생리학 교실에 들어가 사상균(絲狀菌)을 연구하여 졸업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로써 김삼순은 1943년 9월 조선인 여성 최초로 제국대학 이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녀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 이어가던 중 고향에서 잠시 휴식을 갖기 위해 1944년 말 귀국하면서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여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
해방 후 김삼순은 강세형과 혼인하는 한편,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교수라는 직위보다 박사 학위의 꿈을 더 중요하게 여겨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서울대를 사직하고 유학 준비를 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에게 큰오빠가 죽고, 설상가상으로 김삼순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다. 게다가 남편마저 사망하면서 그녀의 일본행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박사가 되겠다는 김삼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1961년 25년만에 일본으로 향하였다. 처음에는 모교였던 홋카이도대학으로 갔으나, 그녀의 연구 주제를 도와줄 교수가 없어 1963년 같은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 도미타 키이치〔富田義一〕 교수가 있는 규슈대학 농학부 생물물리연구실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김삼순은 녹말을 당(糖)으로 분해하는 촉매 효소인 아밀라아제(amylase)의 일종인 다카아밀라제A를 주제로 연구하였다. 그 결과 1965년과 1966년에 일본의 『일본농예화학회지』와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Nature)』에 5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김삼순은 이 논문들을 종합하여 1966년 「다카아밀라제 A의 광불활성 반응(Photoinactivation of Taka-amylase A)」이라는 제목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였고, 그해 7월 57세의 나이로 한국인 여성 최초로 농학 박사가 되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온 김삼순은 건국대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1968년 서울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의 창립 교수로 합류하였다. 서울여대 교수가 된 그녀는 대학 부설로 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설립하고 버섯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균학(菌學) 연구에 착수하였다. 김삼순은 국내에서는 상품화가 안되었던 느타리버섯을 연구하기로 정하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느타리버섯의 국내 인공 재배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로 느타리버섯은 전국 어느 곳이든 재배가 가능하고, 양송이보다 20~25% 수량이 많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김삼순은 1972년 균학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 한국균학회’를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김삼순은 재임 4년 동안 『한국균학회지』 창간, 한국말 버섯 통일안 마련, 국내외 학술 대회 정기 개최, 버섯 공동 채집회와 같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1974년 정년 퇴임한 김삼순은 고향인 담양으로 내려가, 1978년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세계적인 균학자와 교류의 장으로 만들고자 한 이 연구소는 연구 인력과 운영 비용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삼순 개인적으로는 큰 성과가 있었다. 이 연구소에서 후배 연구자인 김양섭과 함께 10여 년간 버섯 연구를 진행하여 1990년 그녀의 나이 81세에 『한국산버섯도감』을 저술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여 논문을 발표하며 2001년 생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