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1925년 5월 10일 천황의 결혼 25주년에 받은 은사금(恩賜金) 17만 엔으로,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개조하여 1927년 5월 10일에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學館)을 개관하였다. 과학관의 이름은 “사회교화사업(社會敎化事業)을 장려하라.”는 천황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은사기념’과학관이 되었다. 초대 관장이었던 해군 소장(少將) 출신의 시게무라(重村義一)는 개관 기념사에서 과학관의 설립 목적을 “저급(低級)한 조선 민중에게 과학 지식을 보급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리고 “고래(古來)의 미신을 타파하고 구래(舊來)의 인습을 버리도록 하여 간접적으로 사상을 선도한다.”라고 덧붙였다. 식민지 과학관이었던 은사기념과학관은 ‘문명화의 사명’이라는 일제의 지배 논리를 실현하기 위한 기관으로 탄생하였다.
1930년대 은사기념과학관은 조선의 자연과 산업 발달에 관한 전시물을 확충하고 『과학관보(科學館報)』(1932.7~1939.6)를 발행하였다. 조선의 공업화로 조선인들이 과학 기술에 관심이 커졌다. 은사기념과학관의 관원들은 조선산(朝鮮産) 동식물과 광물을 광범위하게 수집, 전시,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조복성(趙福成)과 같은 조선인 박물학자와 긴밀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과학 대중화 운동을 펼쳤던 조선인들은 과학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조선인 연구자들이 주도하는 과학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면서 은사기념과학관은 전시 체제에 동원되었다. 일제는 과학 보급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과학관을 사상 통제와 전쟁 수행에 이용하였다.
은사기념과학관의 건축, 전시, 운영 프로그램은 식민지 과학관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은사기념과학관의 건축물은 1907년(광무 11) 통감부(統監府) 청사로 지어진 후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낡은 2층 목조 건물이었다.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자리잡은 이 곳은 식민지 권력이 군림하였던 상징적인 장소였다. 은사기념과학관의 정문 현판에는 조선총독부 총독이 보낸 휘호 “군은만배심”(君恩萬倍深: 천황의 은혜가 매우 깊다)이 걸려 있었다. 과학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과학 기술은 일제 통치자의 시혜를 뜻하고 있었다.
전시물은 1층에 전기, 기계, 가정용품 등과 2층에 기초과학과 동식물 등이 구비되어 있었다. 개관 당시는 주로 식민지를 개발하고 일상생활을 변화시킨 산업제품들이 전시되었다. 부전강수력발전소 모형이나 경성의 도시계획사업과 같이 일본의 문명적 혜택을 선전하는 전시품이 많았다. 과학관의 부대 사업으로 강연, 영화, 지방 순회 강연, 인쇄 출판, 각종 전람회, 부인의 날, 어린이날 행사 등이 개최되었다. 부대 사업은 총독부의 홍보와 지원 아래 관공서, 사회 단체, 학교, 지방 교육회, 학회 등과 연계되어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운영되었다. 단체 관람 덕에 과학관의 관람객 수는 하루 평균 280여 명에 이르렀고, 특히 매주 토요일에 열리던 어린이날 행사는 평균 454명, 많은 날에는 1,000명이 넘는 어린이가 참여하였다. 간단한 실험과 강연, 활동 사진의 상영으로 이뤄진 행사 프로그램에는 일반 과학 상식 외에 일제의 군국주의(軍國主義)를 고취하는 정치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이날 행사의 실험과 강연은 『文敎の朝鮮』와 『과학관보』에 연재되거나 책으로 묶어서 출판되었다.
한국의 국립과학관은 은사기념과학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은사기념과학관은 해방 이후에 국립과학박물관(國立科學博物館), 1970년대 국립과학관(國立科學館), 1990년대 국립중앙과학관(國立中央科學館)으로 변천하였다. 은사기념과학관에서 이뤄진 대중 과학 활동은 한국의 과학기술 문화를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으로는 근대 과학교육이 실시되었던 점이고, 부정적으로는 과학기술이 정치 권력에 이용되는 식민지적 잔재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