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산군(雲山郡)
R.)가 조선정부와 금광채광특허협약을 체결, 이듬해 4월 조선정부와 합동으로 동양합동광업회사(東洋合同鑛業會社)를 창립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광업주식회사로 넘어갔다. 1907년 5월 운산군은 9개 면으로 이루어졌으며, 호구는 4,907호, 2만 282명이었다. 1934년은 5면으로서 9,014호, 4만 8194명, 1943년은 1만 52호, 5만 6090명이었다. 3·1운동 때에는 이 군에서도 운산면·북진면을 주축으로 천도교·기독교가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집회횟수 7회, 집회인 7,600명, 사망자 40명, 부상자 120명, 투옥자 42명이었다.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조직에 있어서는 군감으로 최창렬(崔昌烈)이 임명되었다. 이 군은 내륙에 위치해 무장독립운동이 압록강에 면한 지역보다는 적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