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ㄷㄹㅁ, 솔·파 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형은 한국에서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洪錫厚)이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2세 때 서울 정동으로 이사했다.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에서 1892년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외국선교사의 한글성서번역작업에 참가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조선어선생이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음악에 접하였고 서양음악에 입문하였다.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사립 영신소학교를 다녔다.
1910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과 중학과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하였다. YMCA를 다니면서 1911년 두 번의 세례문답식을 거쳐 입교하였다. 그의 절친한 벗 이관구(李寬求)도 같은 시기에 YMCA와 새문안교회를 다녔다. 청년학과에 다니면서 1912년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성악과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하여 1913년 4월 2회로 졸업하였고, 다시 같은 해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들어가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후 1914년 졸업하였다. 다음 해인 1915년 서양악부 교사로 임용되었다.
1년여 정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하여 의학공부를 하였으나 음악으로 뜻을 굳히고 1918년 4월 관립 도쿄[東京]음악학교(일명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해서 1919년 3월 수료하였다. 같은 해 2월부터 일본에서 음악·미술·문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9월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고 기관지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였다. 『음악계』는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잡지다.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1924년 1월 19일 YMCA강당에서 독주회를 열어 「애수의 조선」을 비롯하여 「하야의 성군」·「로맨스」·「라단단조 가보테」 등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발표하였고, 5월 11일 연희전문학교 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6월 14일 경성의전(京城醫專) 음악부의 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1925년 10월 12일, 24일, 11월 16일, 12월 10일 YMCA에서 수차례 음악연주회를 갖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6년 3월 도쿄[東京]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國立]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로 진학하여 1929년 3월에 졸업하였다. 도쿄고등음악학원에 재학중이던 1928년 도쿄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현재 NHK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 1929년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 교유로 취직하였다가 1931년 미국으로 유학갔다.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극과에 입학해서 1932년 6월 졸업하면서 음악학사가 되었다. 셔우드음악학교에 다니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유로 부임하였고, 홍성유(洪盛裕)·이영세(李永世)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악단인 난파삼중주단(난파트리오)을 결성해서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6월 4일 메이지[明治]제과점 3층 홀에서 첫 시연회를 가졌고, 9월 15일 YMCA 강당에서 2회 연주회를 갖는 등 1936년까지 4년간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하였으나 1936년 홍성유의 죽음으로 해체되었다. 1934년 6월 일본 빅타(Victor)축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을 겸하였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였다. 1937년 11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위촉되었다.
일찍부터 작품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여 「봉선화」(1920), 「고향의 봄」(1929) 등의 동요, 「애수의 조선」(1927) 등의 기악곡 등 150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였으며, 『악전대요』(1916.4) 같은 음악관계 서적과 『조선동요100곡집』(1929.10, 1930.4, 1933.5) 같은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장편·단편소설을 집필해 『처녀혼』(1921)을 발표하였고, 번역서로 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1923)과 에밀 졸라 원작의 『나나』(1924) 등을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글과 평론을 많이 발표하였다.
1937년 ‘동우회(同友會) 사건’을 전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가요를 작곡하고 친일단체에 가입하였다. 1937년 5월 친일문예단체인 조선문예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미국 유학 중에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치렀다. 9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바오딩[保定] 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곡작품인 「정의의 개가」와 「공군의 노래」를 발표하였고 2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10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과 경기도군사후원연맹이 후원하는 ‘음악보국대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고 출연자 수익금 모두를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방헌금에 헌납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달인 10월 ‘동우회 사건’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11월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여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입한 것을 후회하며 일제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1938년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로”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1집에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일제의 가창지도곡으로 선정되었다. 1938년 6월 사상전향자를 회원으로 하면서 반공을 내세운 대동민우회에 동우회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가입하였고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경성중앙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지원병·징병을 선전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노래를 연주하였다. 1939년 10월 라디오로 방송된 애국가 프로그램에서 「대륙행진곡」, 「황국정신으로 돌아가」, 「애마진군가」, 「부인종군의 노래」 등을 지휘하였으며, 11월 「바다로 가면」, 「기념식행진곡」, 「애국행진곡」 등과 12월 「태평양행진곡」 등을 연주하였다. 1940년 11월 기원 2600년 봉축기념 현상 당선곡인 「순정의 꽃장사」를 작곡하였고,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월 29일에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회의에서 문화위원으로 선임되었고, 2월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국민총력의 노래」, 「모두 병사다 탄환이다」,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열사의 맹서」 등을 연주하였다.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1965년 10월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