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獨逸)
흥선대원군이 집정하고 있던 1866년(고종 3)에 중국·일본을 드나들던 독일상인 오페르트(Oppert,E.J.)는 영국상선 로나호에 승선, 내한하여 통상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그 해 다시 엠페러호로 재입국하였으며, 1868년에는 차이나호로 세 번째 입국하여 아산만의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을 붙이는 계기만 만들었다. 또한, 1870년에는 주일 독일대리공사였던 브란트(Brandt,M.A.S.von)가 최초로 국가적 차원에서 의도적인 입국교섭을 시도하였다. 브란트는 1870년 5월 3일 독일 군함 헤르타호에 탑승, 부산에 입항하여 대한(對韓)통상교섭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되자, 공포로 위협사격을 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 조선 정부는 대원군 섭정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