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시자는 웨슬리(Wesley,J.)이다. 영국교회의 사제였던 웨슬리는 그의 선교에 대한 영국교회의 반대가 심해지자, 영국교회를 떠나 순회전도를 하며 그가 믿는 복음을 설교하는 데 전념하였다. 여기에 그의 동생과 동료인 휘트필드(Whitefield,G.)가 가세하여 감리회(Methodist Society)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미국감리회를 위하여 신앙 25개 조를 채택한 1744년의 제1연회(年會) 이후 웨슬리와 휘트필드는 칼뱅(Calvin,J.)의 예정설에 대한 의견 차이로 분리되어 웨슬리파는 감리교로, 휘트필드파는 칼뱅감리교로 각각 분리되었다. 한편, 미국에 전파된 감리교는 1784년에 독립교파를 형성하였으나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노선을 따르는 감리교인들은 웨슬리의 표어인 ‘기독자의 완전’을 향한 체험신앙을 강조하면서 말보다는 사랑의 행동을 앞세운다.
즉, 개인의 신앙체험을 중요시하며, 여기에서 모든 교회활동과 사회활동이 시작된다. 이러한 체험적 신앙성격이 감리교회의 신앙형태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구체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인구원론이다. 개인에 따라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칼뱅의 조건부 구원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예정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신앙이다. 이 체험신앙은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에서 나온 핵심적인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가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고 부활한 구세주임을 확인하고 감격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셋째,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구원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일방적 의사나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넷째, 감리교회는 교리를 노래와 찬송으로 고백한다.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Wesley,C.)는 형의 순회전도 때, 영감에 넘치는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고 불러서 감리회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다섯째, 평신도들에게 교회를 개방한다. 평신도 전도인 제도와 야외전도·순회전도에 평신도들을 선교에 동참시켜 평신도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한다.
여섯째, 기독자의 완전을 추구한다. 웨슬리의 관심은 완전에 관한 이론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에 있는데, 도덕적 완전이 아니고 사랑의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곱째, 교육을 중요시한다.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으로 훈련시킬 것을 강조한다.
여덟째, 사회적 관심을 고양시킨다. 웨슬리는 고아·노인·빈민·노동자들의 영혼 구원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에 대한 복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한 사회제도의 개선을 역설하였다.
즉, 노예제도의 폐지, 절제, 미성년자 노동폐지, 8시간 노동제 엄수, 대금업 폐지 등 사회개혁운동을 일으켜 산업혁명에 따른 영국의 각종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갈등 해소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홉째, 교회연합정신을 강조한다. 남북전쟁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의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말에 따라 점점 일치를 이루어가고 있듯이, 20세기의 교회운동의 하나인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복음과 봉사를 위하여 연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감리교의 선교 시작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 시작이 된다. 1884년 6월 27일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Maclay,R.S.)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의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에게 감리교회의 선교사업에 대한 윤허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시켜 이를 허락하였는데, 그 날이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로써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계획과 준비는 급진전을 이루어, 1885년 4월 5일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 부부가 장로교의 언더우드(Underwood,H.G.)와 함께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Scranton,W.B.)이 서울에 도착하였고, 아펜젤러는 정동의 그의 집에서 그 해 8월 3일부터 한국인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배재학당이다.
이 학교는 급속히 성장하여 한때는 정부의 국비장학생까지 맡아 위탁교육을 하였고, 여기에 감명을 받은 고종은 1887년 6월 8일 그의 사업을 격려하는 뜻에서 학교 이름을 배재학당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한편, 스크랜턴은 그 해 9월 10일부터 정동의 자택에서 환자들을 치료함으로써 정동감리교병원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5개월 전에 개원한 정부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은 주로 정부 고관과 그 가족과 친지들이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정동병원에서는 한약을 쓸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치료를 받음으로써, 이러한 의료혜택을 통하여 기독교복음은 대중에게 퍼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스크랜턴은 그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치료와 무료투약을 하였고, 1년 동안 혼자서 2천 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여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였다.
스크랜턴과 더불어 선교사로 왔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 M.F.)은 1886년 5월 30일에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 자리에서 한 명의 한국인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이화학당이 시작되었다.
이 때의 여성교육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화학당은 초기 한국여성운동의 요람지이며 여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감리교의 교육정책은 처음부터 교회 중심적인 교인양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고양된 민족계몽교육에 치중하였다.
이렇게 감리교는 이 땅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민족의 과제였던 근대교육과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여 민중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1888년에 있었던 ‘아기 소동’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핍박 없이 선교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895년에는 윤치호(尹致昊)의 노력으로 미국 남감리교회가 북감리교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하여, 주로 개성·원산·춘천·고양군 등 중부지방에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울의 배화학당(培花學堂), 개성의 한영서원(漢英書院 : 지금의 松都高等學校), 호수돈여학교 등을 세웠다. 이 두 남·북감리교회는 1930년에 통합되어,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1년에는 1889년 이래 전도사 임명을 받고, 그 뒤 12년 동안 목사후보 훈련을 받아온 김창식(金昌植)과 김기범(金箕範)이 선교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목사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 교세는 급성장하여 1901년에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장하였고, 1904년에는 조선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조선연회(Korea Conference)가 조직되어 중국연회에서 완전히 독립된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 감리교회는 교세의 증가와 더불어 교회조직과 활동분야가 전국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교회의 민족에 대한 영향력도 커져갔다.
특히 미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1898년 해산되면서 독립협회의 주요 간부들이 대거 기독교에 입교함으로써, 주요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민족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서울 남대문에 있던 상동 감리교회가 그 대표적 교회가 되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김구(金九)·이준(李儁) 등이 전국감리교청년연합회를 소집하고 보호조약무효화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투쟁은 일제의 무력으로 무산되었으나, 그 뒤에도 이회영(李會榮)·김구·이동녕(李東寧)·이준·이갑(李甲)·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承薰)·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필주(李弼柱)·최성모(崔聖模)·김진호(金鎭浩) 등이 모여들어 독립운동을 모의하였고, 1907년에는 상동교회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또한, 같은 해 이 곳에서 이준의 헤이그 특사파견을 모의하고 실행하였다. 이렇듯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된 상동교회는 그 안에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젊고 유능한 민족운동가를 양성하였다.
한편, 주시경(周時經)·최남선(崔南善)·장도빈(張道斌) 등이 한글보급운동과 국사지식의 보급운동을 펴, 민족의식과 올바른 사관 확립에 힘썼다.
이와 같은 민족운동의 전통은 3·1운동으로 이어져, 33인의 민족대표 중 16명의 기독교측 대표 가운데 이필주·최성모·오화영(吳華英)·김창준(金昌俊)·박희도(朴熙道)·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정춘수(鄭春洙) 등 9명이 참여함으로써, 더욱 감리교회의 민족정신을 빛나게 했다.
그러므로 3·1운동으로 인한 일제의 감리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가중되었는데, 수원지방 제암리감리교회의 대학살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시기의 감리교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잃어버린 민족의 주권회복에 힘씀으로써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또한 많은 유능한 청년들이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민족운동과 목회가 하나이던 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종교탄압과 일본식 기독교화에 따른 신앙의 변질을 강요당하여,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이 결국 이에 편승하여 교회를 일본의 어용단체로 전락시킨 예도 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교회는 질서를 확립하지 못하고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친일적 행동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 계속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자, 핍박을 받았던 재야인사들이 교회 지도부에 대결함으로써 감리교회는 처음으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른바 부흥파와 재건파의 분열이었다.
이 분열은 6·25전쟁 1년 전에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극적으로 화해가 되어 하나로 다시 통합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교회에 인적·물질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고, 특히 이북의 교회는 완전파멸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정부와 교단본부가 서울에 복귀하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감리교회의 복구작업이 시작되었다.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희생된 목사가족 구제와 교회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사회참여에는 많은 관심을 보일 수가 없었다. 1955년부터 1958년에 호헌파 분열이 있었으나 곧 수습되었다.
4·19혁명은 감리교회에도 혁신의 바람을 일으켜, 그 동안 교회재건에 열중하던 교회지도부로 하여금 교회의 영향력과 그 저력을 사회 구원에 돌리도록 요구하였다.
1974년 총회에서는 10년 뒤에 맞이할 감리교 선교 1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5천 교회, 1백만 신도를 목표로 하는 양적인 성장계획을 세웠으나, 교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즉, 감리교회가 한말과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과제를 선교의 과제로 삼아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던 전통을 저버리고 교회의 건축과 교세의 확충에만 주력한다는 것은 민족을 위한 교회의 길이 아니라는 비판의 소리였다. 이로 인하여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 갱신파의 분열이 있었으나 이 또한 곧 치유되어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78년 교파주의적 선교를 지양하고, 순수선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13회 합동총회에서 실질적으로 다원제 감독제도(多元制監督制度)를 채택하고, 연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구와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다시 1980년 총회에서는 연회를 행정구 단위로 개편, 조직하였다.
또한 1997년 10월 제22회 총회 정기 입법의회에서 총회를 입법총회와 행정총회로 분리, 각각 2년에 1회 격년제로 개최하도록 하였다. 입법총회에서는 교회법 개정과 입법 및 주요 행정사항을 심의, 의결하며 행정총회에서는 감독회장과 감독을 선출한다.
총회 밑에는 1998년 현재 서울·서울남·중부·경기·동부·충북·남부·충청·삼남·국외선교 등 10개의 연회가 있으며, 1년에 한 번 모여서 연회 산하의 구체적인 선교정책을 결정하고, 목사 안수식을 실행한다. 10개의 연회 밑에는 217개의 지방회가 있으며, 각 지방회는 감리사의 관리 감독을 받는다.
지방회 밑에는 당회가 있는데, 당회는 자립할 수 있는 교회, 즉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 몇이 합하여 조직되고, 감리교 기본의회가 되는 당회는 개체교회 중심으로 세례교인으로 조직된 의회이다.
여기에서 구역회 대표를 선출하고, 구역회의에서 지방회 대표를, 지방회에서 연회 대표를, 연회에서 총회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의회제도를 택하고 있다.
감리교회는 1984년으로 선교 1세기를 맞아 북한선교와 동양선교를 위한 도약적인 태세확립과 선교방법 개발에 힘쓰는 한편, 교권 싸움을 지양하여 현대 실정에 맞는 선교신학을 확립하는 방향을 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민주화작업은 우리의 전민족적 과제이므로 이런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하여 먼저 감리교회 안에서 민주화와 의식화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산업화 과정에서 권력과 부에서 소외되는 다수의 민중편에 서서 그들의 고난과 소외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복지와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교회선교를 지양하고, 하나님 선교체제로 그 선교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즉, 감리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종이므로 교회의 프로그램과 교회 건물까지도 지역 주민을 위한 봉사와 그 봉사기관으로 개방하여야 한다.
넷째, 평신도들을 잘 훈련시켜 삶의 현장에서 그들로 하여금 능력 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성속(聖俗)의 이원론을 버려야 한다.
다섯째, 교회의 질적 향상이 교회의 물량적 발전에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교역자들의 신앙적 훈련과 신학적 연수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부단의 자기반성을 통한 갱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감리교회의 당면과제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