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도윤함(都允涵)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0년 아버지를 여의고, 1894년 어머니 홍씨(洪氏)를 따라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4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주1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1904년 무관학교 군사특과에 들어가 졸업한 뒤 주2 간부 훈련 교관으로 임관되었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이후부터 국권 회복 주3에 투신하였다.
황해도 재령에 양원학교를 중심으로 학무회를 조직하여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가 양성에 힘썼고, 고향인 용강에 충일학교(忠一學校)와 사범강습소를 설립하였다. 또한 재령의 문창학교(文昌學校) 교장을 지냈고 주4의 양산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서 김구(金九)와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1910년 11월 안악읍 장로교회에서 미북장로회 선교사 밀러(F. S. Miller, 閔老雅)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10년 12월 안중근(安重根)의 주5 주6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 사건이 탄로되자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1911년 2월 구속되었다. 1911년 7월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9월 경성 공소원에서 기각되었고, 10월 고등법원에서 상고도 기각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첫 부인과 이혼하여 1917년 출감한 뒤 열한 살 아들을 데리고 평양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황해도 재령 최제용(崔濟鎔)의 딸인 최원효(崔元孝)와 재혼하였다.
1919년 2월 9일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鮮于爀)이 평양을 다녀간 후 김성택, 안세환, 이덕환 등과 함께 평양 장로교계 독립운동 준비에 가담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태극기와 독립 주7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3월 1일 정오부터 시내에 배포하게 하였다. 3월 1일 숭덕학교 교정에서 열린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 선언식에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참석하고, 그날 밤 평양을 떠나 조만식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하룻길을 걷고 강동에서 헌병 보조원에게 붙잡혔다. 그는 탈출하였지만, 조만식은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어 돌아와 남몰래 숨어 살다가 1919년 7월 가족을 평양에 남겨 두고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경무국장을 맡고 있던 김구를 비롯한 동지들의 환영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무국장, 무관학교 교관, 학도 대장, 임시 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 단장, 인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는 고려혁명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시베리아로 가서 활동하고, 1922년 10월부터 미남감리회 시베리아 지방의 선교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30년 감리교의 정회원 목사 안수를 받고 시베리아에서 만주 간도의 동흥진(東興鎭)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10년간 선교와 민족독립운동에 힘썼다. 이 지방에 교회 6개 처와 학교 5개소를 신설하여 동흥진교회를 맡았고, 1939년 6월부터 1945년 8월 광복이 될 때까지 간도 연길교회를 담임하였다. 1941년 11월 신경(新京)에서 만주국 안에 있던 조선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조선기독교, 동아기독교 5개 개신교 교파교회를 합동하여 만주조선기독교회를 조직할 때 정무국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17일 귀국하여 11월 3일에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를 맡았다. 1946년 6월부터 황해도 옹진에 내려가 한국독립당 옹진지당부를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옹진교회를 담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제주도로 피난 가서 1957년 3월까지 7년간 7개의 교회를 신설하고, 이 기간 제주도 주8를 맡았다. 도인권은 1969년 2월 28일 서울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