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창은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및 조선교단 경남 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부일협력 활동을 한 장로교 목사이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실업여학교의 재산을 인수하고, 대규모의 적산(敵産) 땅을 불하받아 학교법인 남성·훈성·대동·한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과 부산신학교 교장, 이사장도 역임했다.
김길창은 1918년 마산교회 전도사로 있었고, 1919년 3·1운동 때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이던 김의창이 우편으로 보내준 『독립신문』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다가 경상남도 마산서에 10일 동안 주2되었다. 1923년에는 경남노회에서 목사 주3를 받고 1926년까지 경상남도 거창읍 교회를 담임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부산 영도교회를 담임했다. 1929년 12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일본 도쿄(東京)의 조선유학생교회를 담임했다. 1932년 12월부터 1969년 11월 원로 목사로 추대될 때까지 37년 동안 부산 항서교회(港西敎會)를 담임했다.
김길창은 1933년 3월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겸했고, 1934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는 장로회 주4 연희전문학교 이사를 겸했다. 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주5를 불법적으로 가결하고, 김길창은 당일 부회장으로서 각 주6 총대들을 이끌고 평양 신사에 참배했다. 1938년 12월 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감리교 신구총리사 양주삼과 김종우, 성결교 이명직 목사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이세신궁(伊勢神宮)을 비롯한 일본 신궁들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김길창은 1939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평의원 겸 경남노회지맹 이사를 맡았다. 김길창은 1941년 5월, 경남노회 재산이던 경남성경학원 건물을 매입하여 흥아고등여학원을 창설하고, 1943년 4월 흥아실무여학원(興亞實務女學園)으로 경상남도의 허가를 받아 운영했다. 1941년 10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주7으로 참여했다. 1941년 12월에는 박희도가 대표인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하는 ‘미영타도좌담회(米英打倒座談會)’에 참석한 뒤, 『동양지광』 1942년 2월호에 「영미타도 감상문-대의(大義)의 이름으로」라는 글을 기고해 “영미타도는 천명(天命)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김길창은 부산 항서교회 담임 목사와 장로회 총회 임원과 총회 주8 위원을 지내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및 황민화운동에 적극 협력했다. 1942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장을 맡았다.
김길창은 1943년 5월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될 때 주9을 맡았다. 같은 해 6월에는 경남교구 각 교회 담임자에게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 요목’을 공문으로 보내 실천을 독려하였다. 1943년 12월 마산 신정교회에서 경남교구회와 연성회를 열고, 「대동아전쟁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1945년 7월 개신교 교단들이 통합하여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조직할 때 경남교구장을 맡았다.
해방 후 김길창은 1945년 10월 일본인이 부산에서 운영하던 미시마고등실업여학교 재산 일체를 인수받아 남조선고등여학교로 개칭하여 주10 같은 해, 미군정으로부터 동아대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이사장을 맡았으며,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부산기독교연합회 회장을 겸했다. 대규모의 주11 땅을 주12받아 1946년부터 1967년까지 학교법인 남성 · 훈성 · 대동 · 한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김길창은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같은 해 6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5년 6월에는 야간부 4년제 대학인 경남사범대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았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62년 3월부터 1968년까지는 부산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1971년 9월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자서전을 출판했다. 김길창은 1977년 12월 11일 부산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