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옥은 일제강점기 조선기독교회 창설에 참여하고 해방 후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 중앙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감리교 목사이다. 1930년 남북감리교합동에 참여하여 합동전권위원회 교칙위원회 위원장, 총회 통역위원을 맡았다.
1892년 7월 1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 감리교계 초등학교인 광성학교를 거쳐 1909년 6월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곧바로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1913년 6월 졸업했다. 1916년 11월 미국에 건너가 산호세 퍼시픽학원을 거쳐 노스웨스턴대학교 구내에 있던 미북감리회에서 설치한 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에서 1920년 7월 기독교교육학으로 신학사를 취득했다.
1921년 7월 귀국하여 모교인 광성고보 교원으로 1922년까지 근무했다. 1922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신학을 교수했다.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1923년 6월 웰치 감독으로부터 집사목사 주1를 받고, 1925년 6월 장로목사로 승급했다. 그 기간 중 서울 궁정동교회 목사, 미감리회 조선연회 종교교육부 간사, 조선주일학교연합회 대표, 『신학세계』 부주간 등을 역임했으며, 1928-1930년 조선감리회 종교교육협회 총무를 맡았다. 1928년 4-9월 미감리회 대표로 미국 4년 총회에 참석하였고, 1930년 11월에는 남북감리교회합동전권위원회 교회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2월 남북감리교회 합동총회 통역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3년 만주선교사로 파송되어 하얼빈교회를 맡았다. 1935년 1월 북만주지방 감리사인 현성원(玄聖元) 등과 함께 감리교회를 탈퇴하고, 주2 지양과 자립 선교를 주3로 그해 12월 장로교회의 몇몇 동지들과 함께 ‘조선기독교회’를 세웠다. 이어 교역자 양성을 위해 길림신학교(吉林神學校)를 세우고 교장을 맡았다.
1941년 11월 만주에 있던 조선인교회 5파(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조선기독교회, 동아기독교회)가 만주조선기독교회로 합동할 때 새 교단의 교육국장을 맡았다. 1943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던 중 민족주의자의 혐의를 받아 길림에서 주4 해방될 때까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월남하여 1946년 7월 주5 총무로 선출되고, 그해 12월 민선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YMCA 건물을 빌려 이호빈과 함께 주6 신학교인 중앙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맡았다. 1950년 3월 초 청주 YMCA 창립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자 출장 중 4일 급성 췌장염으로 청주도립병원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