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희는 일제강점기 서울 경기 지역 3·1운동과 한성정부 조직, 신간회에 참여하고, 광복 후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장로회 목사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84년 12월 11일 서울 연동(蓮洞)에서 박홍근(朴弘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별세한 9세 이후 주1을 공부하며 집안을 돌보았고, 1902년 서용신(徐容信)과 결혼하였다. 1907년 가족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해 연동교회(蓮洞敎會)에 출석하였고, 1908년 게일(James Scarth Gal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0년 교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1912년 일본에 건너가 나카다 주지〔中田重治〕가 이끌던 홀리네스계의 도쿄성서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건강이 회복되자 묘동교회 전도사로 주2, 용산교회 · 왕십리교회 · 뚝섬교회와 고양 · 죽산 · 용인 · 광주 등지의 교회에서 주3. 묘동교회가 일본 교회로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다가 포교권을 박탈당하고 경기도 이천에 은거하였다.
1917년 12월 경기충청노회 속회에서 7년간 쉬던 신학을 계속할 것을 허락받았다. 1918년 12월 승동교회에서 열린 경기충청노회에서도 장붕(張鵬)과 함께 1919년부터 신학교 3년생으로 신학을 계속할 것을 승인받았다. 이때 경기충청노회 전도국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노회의 순회 부흥 전도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19년 만세운동 참여로 신학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였고, 1919년 6월에 열린 제16회 경기충청노회에 박용희가 5월부터 순회 전도인에서 해임되었음이 보고되었다.
1919년 2월 25·26일경 함태영(咸台永)의 집에서 이승훈(李昇熏)의 부탁을 받아 박희도(朴熙道)가 체포된 뒤, 박희도의 임무였던 운동 자금 회계를 맡기로 했다. 3월 22일 성태영(成泰永) · 이병린(李炳麟) 등과 함께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월곶면(月串面) 군하리(郡下里) 장날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모였던 이른바 ‘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모임에 장붕과 함께 예수교 대표자로 참석하였다. 이후 서울에 다시 잠입하였으나 정세가 불안해 국외로 망명하여 간도와 상하이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11월경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조사원으로 백준(白浚)과 함께 경기도 고양군을 맡아 활동하였다.
서울에 돌아와 1921년 6월 용산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다가 안성읍교회로 옮겼다. 안성읍교회에서는 1925년 6월 개최된 제2회 경기노회에 ‘박용희 장로를 목사로 주4 시무케 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노회에서 신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하였지만 경력을 인정받아 표결을 통과하였고, 그 해 12월 31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3회 경기노회에서 목사 주5를 받았다.
1927년 초에는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신간회 안성지부 지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경기노회 노회장으로 주6. 1928년 7월에는 서울 승동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29년 5월에는 기독신우회에 주7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에도 선임되었다.
1932년 감리교의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함태영 · 전필순(全弼淳) · 최석주(崔錫柱) 목사 등과 함께 참여해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주8의 기독교 정신 · 신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급진적 · 비밀적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교계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1935년 4월 승동교회를 사임하고 목포 중앙교회를 담임하였고, 1938년 전남 순천중앙교회로 전임하였으며 순천노회장에도 선임되었다. 순천중앙교회 재직 당시 설교를 통하여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였다. 이 일로 1940년 11월경 순천노회원 15명 전원이 말세 신앙을 설교하여 일본의 ‘국체 변혁’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 순천경찰서에 주9. 결국 재판에 넘겨져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4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4년 풀려났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기독신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2월 15일에는 관선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영등포교회를 담임하다가 1953년 6월 기독교장로회가 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되자, 기독교장로회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2년간 다시 목포중앙교회를 담임하고 1955년 대한기독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전신) 총회장과 한국신학대학 이사장을 지냈다. 1959년 5월 16일 서울에서 75세로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주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