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묘역의 넓이는 400㎡이다. 묘소는 하상동 마을 뒷산에 동북향으로 안장되어 있고 근래에 새로 단장했다.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부인과의 합장묘이다. 크기는 높이 3m, 둘레가 7m이다.
묘 중앙 앞에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놓여 있다. 옆은 장대석(長臺石)으로 2단의 계절(階節 : 무덤 앞에 평평하게 만든 땅)을 쌓고, 앞쪽으로는 좌우에 문인석을 1기씩 쌓았다. 묘비에는 ‘議政府左贊成晉山君文良公姜公之墓 貞夫人安氏祔葬(의정부좌찬성진산군문량공강공지묘 정부인안씨부장)’이라는 명문이 있다.
문인석은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양식과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문인석은 전기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공복을 입고 홀(笏)은 든 모습이다. 후기에는 금관조복(金冠朝服)에 홀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묘역의 문인석은 두 손을 가슴에 대고 자연스럽게 맞잡은 자세이다.
머리에는 이암(耳埯 : 귀를 덮음)식 모자를 썼다. 귀를 덮는 부분을 뒤로 젖히고 이를 끈으로 묶어 끈 자락을 목 아래까지 드리웠다. 몸체는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 상전의 분부를 기다리는 시자(侍者)의 공손한 모습을 잘 표현했다. 장명등(長明燈)이나 망주석(望柱石)이 세워져 있지 않아, 생전의 강희맹의 청렴한 성품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묘역 아래 왼편으로는 화강암으로 만든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그 규모는 총높이 239㎝, 비 높이 139㎝, 너비 80㎝, 두께 20㎝이다. 비문은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전액(篆額)과 본문은 박증영(朴增榮)이 썼다. 비문 끝에 홍치(弘治) 원년의 기록이 있어 1488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묘소 어귀에는 근년에 세운 사우(祠宇)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