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조선 사회주의 청년운동의 총 지도기관으로 조직되었던 비밀지하단체이다.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다음날 창립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청년에게 사상교양을 하고 선전훈련을 하는 예비학교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과 보조를 맞추며 활동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주도하였고, 1927년 신간회 지회 설립 운동에 주동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의 영향으로 조선공산당이 해체되면서 개별적인 재건 활동에 전념하였다.
1925년 4월 18일,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다음날, 서울 훈정동(薰井洞) 4번지 박헌영의 집에서 10개도 28개 세포회의 대표 19명과 조선공산당 대표 1명(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김찬) 등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선출된 각 부서 및 후보위원은 다음과 같다. 책임서기 박헌영(朴憲永), 비서부 박헌영 · 홍증식(洪增植), 조직부 박철환(朴哲煥) · 권오설(權五卨), 선전부 김찬 · 박철환 · 권오설, 조사부 김단야(金丹冶) · 홍증식, 후보위원 주세죽(朱世竹) · 조이환(曺利煥) · 임원근(林元根) · 염창렬(廉昌烈) · 전무(全無) · 김광(金光) · 장수산(張水山) 등이다.
이 단체는 청년단체의 ‘30세 연령제한’과 군연맹, 도연맹, 총동맹의 청년단체 조직 방침과 ‘노력군중’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민족주의자 및 혁명적 종교단체와의 협동전선을 통한 조선혁명 등의 운동방침을 가지고 활동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1925년 7월에 국제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지부로 승인받은 후 고명자(高明子) 등 21명의 유학생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 1927년 5월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 단체는 시기에 따라 회원의 연령을 30세나 25세로 제한하였는데, 회원은 크게 회원과 후보회원으로 구분되었다. 입회시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경우, 회원 1인, 기본책임자 1인, 지방집행위원 1인(지방집행위원이 없을 때에는 중앙집행위원 1인)의 보증서가 요구되었다. 입회 여부는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단체의 조직체계를 보면, 전국 최고의 지도기관은 전국대회로서 대의원이 조직하였다. 전국대회에는 중앙집행위원과 검사위원을 선거하고 각각 중앙집행위원회와 감시위원회를 두었다.
각 도 및 군, 부의 경우는 각각 도 및 군, 부대회를 통해 집행위원회와 검사위원회를 두며, 집행위원회는 기본적으로 비서부, 조직부, 선전부를 두었다. 군, 부 및 도 등 전국적인 표현운동단체의 활동은 프랙션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조선공산당과 일치된 보조를 취하고 각 공청기관의 집행위원 가운데 1명은 반드시 조선공산당 각 기관의 집행위원 가운데에서 선출했다. 1926년 5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결성과 때를 같이 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을 설치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 일본부 조직과 같은 시기인 1927년 3월경, 한림(韓林)을 책임비서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를 설치했다. 일본부는 그 해 11월 김상혁(金相爀)을 책임비서로 하는 간부 개선을 단행하고 도쿄 지방에 3개의 야체이카를 조직했다.
1925년 11월부터 1926년 5월까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의 고려공산청년회원들과 서울청년회의 고려공산청년동맹 내 ‘신파’세력인 민주공산청년파 지도자들은 꼼 그룹을 망라한 통일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두 단체는 1926년 7월, 각기 내부적으로 합동을 결의한 후 8월초 합동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단체는 1926년 7월과 8월에 발생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으로 궤멸적 파괴상태에 처하였다. 그러나 고광수가 재건에 성공해 권오설 책임비서시대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이후 양명, 하필원(河弼源), 김철(金哲) 등의 책임비서를 거치면서 1928년 2월까지 전국의 고려공산청년회 각도 위원회와 군부위원회 및 다수의 직업별, 계층별, 지역별 야체이카를 건설했다.
그러나 1927년 12월, 이영(李英)과 김영만(金榮萬) 등이 기존 조선공산당 중앙에 반대하고 춘경원당의 중앙 간부 및 지방 기관을 조직함으로써 고려공산청년회의 일부 지방조직이 이탈하기도 했다.
1928년 2월, 제1차,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검거사건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의 대부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3월에 김재명(金在明)을 책임비서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을 재건했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12월 테제’에 의해 기존의 조선공산당을 해체하고 새롭게 통일된 당을 건설하려고 하자 고려공산청년회는 명맥을 잃고 각 꼼그룹의 개별적인 공장 재건활동에 전념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청년에게 사상교양을 하고 선전훈련을 하는 예비학교의 성격을 가졌다. 이 단체는 아직 사회주의운동이 이론의 미숙과 경험의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상황 속에서 공산대학에 학생을 파견하고 직접 학교를 운영함으로써 청년운동지도자들의 사상을 순화하고 그들에게 선전방법을 훈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고려공산청년회는 직접 대중 속에서 투쟁을 통한 훈련보다 사상무장을 강조함으로써 대중화에 한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