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석장리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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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석장리 유적 전경
공주 석장리 유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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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집터 · 석기 · 토기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 한데유적 · 화석산포지. 사적.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에 있는 석기시대 구석기의 집터 · 석기 · 토기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 한데유적 · 화석산포지. 사적.
개설

1990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유적은 1964년 5월 큰물이 지나간 뒤 무너진 강가 언덕에서 확인되었으며, 바다높이보다 14.7m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 22일에 시작하여 해마다 한두 달씩 10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내용

석장리 유적은 장군봉(364m)에서 가파르게 흘러내리는 물매를 지닌 산기슭이 대평리쪽에서 흘러내리는 금강과 마주치는 강 언덕을 이루는 곳에 위치해 있다. 지질층위는 27개로 이루어져 있다. 층위는 물에 의한 것이 아닌 육성층에 차례로 빙하기에 쌓인 모난돌층의 문화층과 간빙기에 쌓인 찰흙층이 엇갈려 이루어져 있다.

유적의 지층은 층위상으로 맨 아래 바닥 바위층도 바다높이 위로 3m밖에 안 되는 얕은 곳에 있다. 맨 밑 문화층이 시작되는 곳은 바다높이가 매우 얕았던 때로 빙하기였음을 알 수 있다. 아래층들은 빙하기에 쌓였고, 간빙기에 이룩된 층은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전기 구석기층까지는 물에 많이 쓸려나갔고, 중기층부터는 찰흙층이 쌓였다. 굳은 찰흙층이 더운 기후에 갈라져 틈 사이로 나무뿌리같이 끼어든 흙층의 아래쪽에는 덥고 메마른 기후로 인해 이루어진 산화철 뿌리테가 있어 셋째 간빙기로 볼 수 있다. 맨 밑층부터 중석기 문화층까지 모두 12개의 문화층이 이루어져 있고, 겉흙층에서는 민무늬토기조각과 갈아 만든 화살촉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는 전기 구석기시대 때부터 중석기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기에 걸쳐 사람이 살았고, 그 후 청동기시대에 다시 사람이 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 집터에서는 사람 머리털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 이 집터층에서는 석기 제작 기술 중 가장 발달된 돌날떼기를 이용해 돌날·밀개·새기개 등을 만들고, 기둥을 세워 움막집을 짓고,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운 것이 확인되었다. 이 밖에도 땅바닥을 후벼파서 고래모습을 나타내고, 돌에 금을 새겨 불을 일으키고, 돌을 떼고 잔손질해 물고기·거북·새 들을 나타내기도 했다.

화덕에서 나온 재를 방사선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2만 8000년 전으로 밝혀짐에 따라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같은 갈래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석장리 유적은 제1·2지구로 나누어진다. 제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층에서 2만 8000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00년 전의 연대가 밝혀졌다. 제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여러 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 기술은 외날찍개·안팎날찍개·이른 주먹도끼·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긁개·돌려떼기석기·돌날석기·새기개·좀돌날 등의 단계로 이어졌음이 밝혀졌다.

석장리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주로 차돌·쑥돌·편마암들이 출토되었다. 중기 구석기층에서는 차돌반암·규장암·유문암 등이 새로 나타났다. 후기 구석기층에서는 흑요석·차돌반암·옥수(玉粹)들이 새로 쓰여졌다. 중석기층에서는 수정·규장암·유문암이 더해졌다.

석기의 모습은 떼는 수법과 석기의 돌감의 성질, 즉 돌의 결이나 낱알의 굵기, 굳기, 짜임새(결정)들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석기의 재료는 전기에는 석장리의 산기슭에서 날라다 쓰고, 후기에는 더 먼 곳에서 흑요석들을 찾아 날라다 쓴 것으로 밝혀졌다.

전기의 석기는 모난돌들을 떼어서 만들었고, 중기에는 반암자갈돌을 찾아서 만들었으며, 후기에는 떼기에 좋은 유문암·흑요석·반암을 많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전기 문화층들은 지금의 강물높이보다 얕아서 물이 스며들어 좁은 면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앞으로 더 발굴해야 한다.

최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사이에 이루어진 층이다.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 사이에, 3·4문화층은 21만년 전의 제3빙하기 뒤쪽에, 5문화층은 18만년 전의 빙하기에, 6문화층은 제3간빙기 12만년쯤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문화층은 따뜻한 기후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는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오고 있다. 이 층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도끼, 돌려떼기수법의 몸돌, 격지들이 있어 연대가 7만∼6만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6만∼5만년 전으로, 10·11문화층은 3만∼2만년 전으로 각각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공주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에 구석기학을 성립시키고, 우리 역사가 오래지 않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바로잡는 데 바탕이 된 유적이다. 앞으로 더욱 자세하게 발굴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석장리 구석기문화의 발굴은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여러 문화층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룩되었음을 밝혀주었다. 그리고 구석기 유적에 대한 조사·발굴·연구를 잇따르게 했고, 종래 동관진유적에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을 믿지 않던 학설을 고쳐 우리 나라의 역사를 바로 보게 하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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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toir-burin Carere Discovered at Sokchang-ni,?Korea(孫寶基, 東方學志 9, 1968)
「석장리 이외의 구석기문화의 분포가능성」(孫寶基, 白山學報 7, 1969)
「석장리 새기개·밀개 문화층」(孫寶基, 韓國史硏究 5, 1970)
「석장리 후기구석기시대의 주거지」(孫寶基, 延世論叢 8, 1971)
「석장리의 전기·중기구석기 문화층」(孫寶基, 韓國史硏究 7, 1972)
「한국구석기문화에 대한 몇 가지 문제」(孫寶基, 文化財 6, 1972)
「韓國の舊石器文化」(孫寶基著, 後藤直抄譯, 朝鮮考古學年報 3, 1972)
「석장리 후기구석기시대 집자리」(孫寶基, 韓國史硏究 9, 1973)
The Early Palaeolithic Industries of Sokchang-ni, Korea(孫寶基, Early Paleolithic in South and East Asia, 1978)
『韓國 後期舊石器時代의 製作技法과 編年 硏究』(장용준, 2007)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손보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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